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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질고개 Apr 16. 2024

15. 실패-II, 자녀의 재도전

교통사고


2003년 3월, 둘째 아들이 교통사고로 다쳤다. 방과 후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길을 건너다 학원버스에 치여 오른쪽 발목이 끊어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집 근처 강동성모병원 응급실로 이동되어 발목 접합 수술을 했다. 2차 수술이 걱정되어 나는 접합 수술로 유명하다는 신촌에 있는 한 병원으로 아이를 옮겼다. 꽉 막힌 강변북로를 구급차를 타고 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4개월 동안 우리 가족은 병원 입원실에서 생활하며 출퇴근과 등하교를 했다. 시련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교통사고 났던 그해 5월 어린이날이었다. 둘째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갖고 싶은 것을 물었다. 우리가 함께 세계여행 다닐 때 태국 카오산로드에서 장기 숙박하면서 길거리에서 맛있게 먹었던 ’포크커리‘를 먹고 싶다고 했다. 다리가 불편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자유로웠던 지난 여행이 그리운 것 같았다. 나는 서울 시내 음식점 정보를 모두 찾아서 태국 음식점마다 들러 포크커리를 주문하려고 했다. 다행히 이태원의 한 태국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 메뉴에는 그 음식이 없었지만, 태국인 주방장이 그 태국 길거리 음식을 특별 메뉴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20인분을 주문해서 그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모든 어린이 환자와 그 음식을 나눠 먹었다. 둘째는 다른 어린 환자들과 포크커리를 나눠 먹고 태국 음식과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어린이날을 보냈다.


그 후 둘째 아들은 재활치료와 서울아산병원 스포츠의학과에 다니며 2년간의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당시 영구장애로 판정되었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발목 접합 수술을 하고 재활, 그리고 몇 년간 아산병원에서 스포츠의학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이는 정상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이후 나는 회사 개발 업무로 주말 근무를 하더라도, 늦은 오후 양재역 퇴근길에 아내와 서로 연락하곤 했다. 아내는 내 체육복과 운동화, 그리고 음료수를 준비하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우리 가족만의 축구를 거의 10년 가까이 함께했다.


아이가 오른발 대신 왼발로 공을 찰 수 있도록 큰아들과 함께 둘째를 혹독하고 집요하게 다그치며 운동장을 함께 뛰었다, 가족 모두가 그를 위해 헌신한 덕택으로 아이는 왼발잡이로 축구를 제법 즐기게 되었다. 몇 해 뒤 어느 가을 늦은 밤, 퇴근하고 보니 가족 모두가 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큰아들의 힘찬 박수와 함께 둘째 아이가 가을 운동회에서 달리기 3등을 해서 상품으로 타 온 공책 1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내의 귀띔으로는 앞에 아이가 넘어지면서 어부지리로 3등을 했다지만, 나는 그 둘째를 천장 높이 들어 올리고 힘껏 안아 주었다. 그리고도 더는 참을 수 없어 화장실로 혼자 뛰어 들어가 참 많이도 울었다.     

세월이 흘러 놀랍게도 아이의 발목 신경이 발등과 발바닥으로 번져가고 새롭게 신경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어린아이다 보니 놀라운 생명의 힘이 완전해지지는 않지만, 발등에 생기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외상으로 보면 아직은 보기 흉하지만, 나는 새벽에 출근하면서 그 아이의 발을 만져주고 가끔 내 얼굴을 아이의 발에 비비고 출근하곤 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발목에 경련을 느낄 때도 있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두 발로 당당히 걸어가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기적을 경험한다.


둘째의 재도전


어릴 적 공부를 잘했던 큰아들과 달리, 둘째 아들은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놀기 좋아하는 산만한 개구쟁이였다. 중학교 사춘기, 너의 달라진 성격과 행동들로 인해 어머니와 가족 모두가 많이 당황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그 기간이 길어지지 않고 니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4월 16일 출근길 이른 아침에 아버지가 잊지 못할 우체국 소인이 찍인 편지 한통을 어머니로 부터 건네 받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니가 보낸 청년기 고백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고 앞으로 학업에 집중해서 부모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담긴 편지였다. 

그 편지를 읽고서 아버지가 뭔가 의미있는 말을 하려했지만,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 가을에 사람이 되었는데 너는 아버지 보다 1년 먼저 이렇게 어른이 된 것 같구나. 축하하고 대견하구나"라며 니 어깨를 두드려주고 출근을 서둘러 했던 기억이 나는 구나. 

그 당시 아버지는 중요한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 매일 같이 힘들고 지친 나날이었지만 그 편지를 읽고서 조금 늦어진 그날 출근 길에 내 머리가 신선해지고 뭔가 새로운 들뜬 기분과 벅찬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때가 아마 너에게는 성년의 날이라는 증표가 될 것 같구나. 지금도 그 당시 니가 보낸 그 편지 한통을 아버지는 우리 가족, 특히 너의 인생의 전환점, Tipping Point로 기억하고자 잘 보관하고 있다. 나중에 니가 결혼하는 날 아버지는 너의 모든 기억과 영상물들을 모아 하나의 다큐먼터리 처럼 한편의 인생드라마를 만들어 결혹식 피로연에 펼쳐보이려고 한다.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공부를 시작했다. 아마도 중학교 졸업과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상황에서 형의 의대 진학, 본인의 특목고 낙방과 친구들의 진학 등의 상황 변화가 실패 경험이 되어 뒤처진다는 많은 내적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한눈팔지 않았고 서서히 성적을 향상했다. 어린 시절 독서 습관이 밑거름된 것 같다. 그러나 대학입시에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재수했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즈음 그는 내게 학원을 더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금이 벌써 8월 말이다. 수능을 겨우 몇 개월 남겨 놓고 왜 갑자기 학원을 안 다니겠다고 하니?“

“이제 수학 문제를 보면 토할 것 같아요.”

“니가 얼마나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도대체 어디를 갈려고 그러니? 희망하는 학과와 대학이 뭐냐고?”

“나도 형처럼 의대 가려고 합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둘째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지를 잘 몰랐다. 그날부터 학원 가지 않고 동네 카페나 독서실, 그리고 송파도서관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혼자 공부하며 수능 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는 정말 토할 정도로 수학 문제를 많이 풀었다고 했다. 그해 수능에서 수학의 출제 난이도가 예년에 비해 상당히 높았던 해였지만 수능 당일 가채점에서 수학이 만점이었다. 둘째는 갑자기 거실 창문을 열고 창밖을 보면서 흐느껴 울었다. 우리 가족 모두는 그의 놀라운 노력에 감격하여 함께 울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평생에 걸쳐서 ‘공부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아이는 사춘기에 많은 방황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어느날 아침, 그는 "어머니!"라고 크게 외치며  스스로 다시 가족에게 돌아왔다. 비록 늦었지만 그때부터 마음을 바로 잡고 평생 하지 않았던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졸업 후 한 해 더 재수해서 놀랍게도 그렇게 의대에 입학하고, 지금은 듬직한 내과 의사가 되었다.


혹 정상 사람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조금은 모자라는 것이 불편을 주기는 하지만 오히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극복 의지가 굳세 지고 가족을 더욱 강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콤플렉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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