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예정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루카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출산 시 필요한 각종 용품들과 출산 후 병원 입원실에서 사용할 물건들이 하나둘 채웠다. 첫 출산을 앞둔 예비 아빠는 옆에서 멀뚱멀뚱 그녀가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새벽 1시쯤, 하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옷을 챙겨 입고 산부인과로 곧장 향했다.
당시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병원은 엄격한 방역 지침으로 운영되고 있어 남편도 분만실 출입이 금지되었다.
산모조차 출산 과정 내내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이런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규정 때문에, 하루카는 며칠 전 숨쉬기가 조금이나마 편한 특수 마스크를 구입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하루카는 분만실로 향했고, 아호는 별도의 격리된 공간에서 혼자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의사 선생님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축하드립니다. ○시 ○분 남자아이를 출산하였습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
그 순간의 안도감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 분만실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분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있는 하루카가 보였다. 출산이 많이 힘이 들었는지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었다. 하루카는 무통 주사를 맞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었다. 일본 산부인과에서는 마취 전문의가 귀하다고 했다. 하루카보다 한 살 위인 사촌언니는 마취 전문의가 상주하는 산부인과에서 출산했는데, 그곳 인기가 어마어마해서 대기가 항상 꽉 차 있었다. 예약조차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분만실 한편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간호사는 아호를 그곳으로 안내하더니 말을 건넸다.
"윗옷을 벗어주세요."
상의를 벗자, 간호사는 방금 태어난 아기를 아호의 품에 안겨주었다.
"아빠의 체온을 아이에게 전달해 주세요. 이렇게 안아주시면 됩니다."
간호사는 아기를 안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호는 생전 처음으로 신생아를 안아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작은 생명을 품에 안았다. 안기기 전까지 힘차게 울던 아이는 아호에게 안기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아호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흰자와 검은 자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신생아의 눈빛은 어딘가 낯설고 신비로웠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러면서도 온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그런 눈빛. 아호는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품 안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생애 첫 아이와 눈 맞춤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출산 후 5일간 병원에서 입원을 한 후, 하루카는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한국이라면 산후조리원에 가겠지만 일본에는 산후조리원이 없다. 대신 친정 부모님이 딸의 산후조리를 돕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장모님은 매 끼니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아호는 첫째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아내와 함께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일본 육아휴직 제도는 자녀가 만 1세가 될 때까지 부모 모두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다. 아호 주변에서도 아빠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만, 법으로 보장된 1년을 꽉 채워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이유는 경제적 부담이 제일 컸다.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본인 급여의 60%가 육아 휴직 급여로 나온다. 일본의 높은 생활비를 감안하면, 맞벌이 부부 둘 다 휴직을 길게 쓰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다.
아호는 육아 휴직으로 아빠 육아의 세계로 입문했다.
끊임없는 집안일과 아이 돌봄의 연속이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매일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는 일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또 어느새 다음 식사 시간이 되었다.
아기 옷, 침구, 수건, 거즈, 빨랫감은 끊임없이 쌓였다. 세탁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렸다. 청소는 틈틈이 해야 할 일이다.
어느덧 하루는 훌쩍 지나가 있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처럼 명확한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무언가 한 것 같은데, 막상 돌아보면 뭐 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육아휴직을 하며 아호는 깨달았다. 집안일과 새 생명을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를. 그 시간 덕분에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하루카에게 조금이나마 숨 쉴 여유를 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아이를 낳고 살아온 이야기를 쭉 적어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본에서의 일상이다. 산부인과, 산후조리, 그리고 육아휴직 제도까지. 한국과 다른 부분들도 있지만,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어디서나 비슷한 것 같다.
연애를 넘어, 결혼 그리고 출산까지. 아호 인생의 큰 사건들을 일본에서 하나씩 보내게 되었다.
이제 이곳은 그저 '일본'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사는 곳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을 이루었다. 아호는 아호패밀리가 되어 이곳에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