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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당동붓다 Jul 07. 2020

먹고사는 일

나는 내 나이 29살에, 아이를 2.7kg에 낳았다. 그 당시에는 일이 많기도 했거니와 아이를 너무 크게 낳고 싶지 않아서 음식도 조절하고 아이를 낳기 2주 전까지 운동을 하며 나와 아이의 건강관리에 열의를 불태웠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모두가 말했다. 건강관리를 잘해서 아이의 크기도 딱 적당하고 산모도 살이 그렇게 많이 붙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이를 낳고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수한 잔소리를 듣고 있다. 아이가 입이 짧다는 산후도우미부터 시작해서, 아이를 쫒았다니며 밥을 주시던 양가 어머님들, 내 딸의 다리가 너무 얇다는 동아의 친구 엄마까지.


내가 뭘 잘못한 줄 알았다. 처음에는 모유의 양이 적어서 그런가 하고 약도 먹고 티도 마시고, 국물이란 국물은 다 마시고 시도 때도 없이 모유수유를 했다. 그러고 나서 이유식을 시작할 때는 하루에 3시간만 자고 이유식을 만들었고, 유아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말 몇 년간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딸은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이유는 늘 다양했는데 주된 이유는 '지금은 배고프지 않다, 양이 너무 많다, 억지로 먹이면 토할 것 같다.'였다. 나는 밥과 관련된 모든 게 정말 너무 힘들었다. 잠도 못 자고 음식을 하는 일, 나의 노력의 산물을 아이가 먹지 않는 것, 식사예절을 가르쳐야 하는데 쫒아다니면서 밥을 주시는 양가 어머님, 애가 너무 마르고 작다며 쉽게 말하는 사람들까지. 나는 그냥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가 밥을 다 먹고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갔다. 집이라는 공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어서.


한동안을 그러다가, 아이가 세 살쯤 되었을 때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집은 우리 가족이 편하게 쉬는 곳이고,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내는 소중한 몇 시간 중 고작 밥 먹는 몇십 분 때문에 아이와 나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식사시간이 즐거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험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를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엄마 밥해야 하니까 저기 가서 혼자 놀아."가 아니라, "우리 함께 오늘은 무엇을 만들까?"로 바뀌었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주듯, 소금을 빻는 것, 계란을 젓는 것, 버섯을 자르는 것은 모두 동아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먹을지 함께 준비하다 보니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소금은 짜서 좋아하고, 계란은 노른자보다는 흰자가 좋다고 했다. 버섯은 식감이 싫어서 먹기 싫다고 했고, 반대로 브로콜리는 식감이 좋아서 맛있다고 했다. 새우와 생선은 부드러워서 맛있지만, 고기는 식감이 질겨서 목 삼킴이 어려워서 먹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동아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왜 그런지를,  동아를 낳은 지 3년 만에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왜 안 먹니!' 라며 원망만 하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굳이 쌀밥에 집착하지 않고, 대부분의 음식은 요리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일품요리만 했다. 어떤 날은 빵과 우유를 먹었고, 어떤 날은 하루 두 끼를 먹는 날도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먹었고, 아이가 밥을 먹을 때 꼭 같이 먹었다. 그래야지 아이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 음식이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매일매일 동화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름다운 식사시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가 불러 그만 먹겠다고 하면 '한 숟갈만 더'는 하지 않았다. 그것만 하지 않아도 아이는 밥을 먹기 싫다며 울면서 도망 다니지 않았다. 빨리 먹으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다만, 먹다가 장난치며 딴짓을 해서 처음에 정한 양이 남으면 그 벌로 혼자 식탁에 남아 먹어야 했다. 동아가 4살쯤 되었을 때, 더 이상 우리에게 식사시간은 힘든 시간이 아니었다. 각자 먹을 것을 정했고, 먹고 싶은 것을 각자 정한 만큼 먹었다. 고작 내 마음 하나 내려놓은 덕에 우리 가족 전체의 식사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즐거워졌다. 지금도 외식을 해도 핸드폰을 쥐어주며 억지로 입에 넣어주지 않는다. 밥 먹는 시간은 서로 눈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야기하기에 바빠야 하는 소중한 시간이니까.


배부른 느낌이 싫다는 동아는, 아직도 남들에 비해 많이 먹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동아의 가녀린 팔다리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은 충고를 하고, 함께 사는 어른들은 푸념을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우리 동아는 또래에 비해 마른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동아에게 딱 맞는 몸을 가졌다고. 예민한 입맛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섬세한 미각을 가진 것이라고. 밥을 그저 '먹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밥을 준비하고 먹는 그 시간이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남들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내 딸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 자체로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 딸을 믿어주고 기다려주며, 우리가 함께 커가는 그 시간을 지치지 않고 응원하며 지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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