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겨울, 그리고 계속

by 아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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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시 파크를 처음 만났던 2022년 1월. 세 번의 계절을 보내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처음 겪은 축축하고 피곤하고 우울한 계절이 아니었다. 12월 초 어느 토요일. 그날 아침은 기온이 영하까지 내려가 있었고, 뽀얀 입김이 이는 바깥공기는 과제의 압박을 모두 내려놓은 대학원생에게 마치 탄산수처럼 느껴졌다. 그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공원에 갔다. 그리고 그전엔 보이지 않던 겨울의 즐거움이 내 눈에 보였다.


하얀 서리가 낀 이파리, 차갑고 상쾌한 공기를 내 방으로 초대하며 시작했던 하루, 핫초코와 뱅쇼, 따끈하고 달콤한 애플크럼블, 11월부터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연말 긴 연휴를 앞두고 있는 들뜬 마음들. 겨울이면 어김없이 배터시파크 한쪽엔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들을 파는 곳이 생긴다. 크고 작은 나무들을 고르고 사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건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겨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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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그해엔 영국 밖으로 여행을 나간 적이 없었다. 유럽 옆 나라를 가는 게 영국 내 도시로 가는 것보다 저렴했지만, 그마저도 아까웠다. 그러다 졸업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문득 샤갈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검색을 하다 프랑스 남부 니스에 샤갈 뮤지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졸업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후 그곳으로 훌쩍 떠났던 12월 중순. 크고 다채로운 샤갈의 원화를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그날, 한참을 앉아 그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걸 누리려고 영국에 온 건데, 앞가림하느라, 아픈 마음 돌보느라 여유가 없었구나.' 하고. 치열하고 지난했던 1년을 조용히 정리하며 다짐했다. 너무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괴로워질 때면, 생각을 멈추자고. 앞가림이라는 단어에 짓눌려 일상을 그 생각을 멈추게 해주는 것들을 이것저것 해보자고. 그게 나를 지치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해주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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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박 5일의 일정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 며칠을 집에 머물며 여독을 풀었다. 추위가 뼛속으로 스미는 것 같은 날씨로부터 몸과 마음을 녹여줄 김치찜과 김치수제비를 해 먹으며. 원기를 회복한 뒤, 목도리를 칭칭 감고 집 앞 파크로 나갔다. 마치 멀리 나갔다 돌아온 자식을 맞아주는 엄마 같은 품. 역시나 사르르 하고 녹는 마음의 피로.


그 안전기지 같은 품을 몇 번이고 파고들며, 사계절을 두 번 더 보냈다. 그해 여름부터 시작한 일기장이 몇 권으로 늘어간 만큼, 휘청거리던 내 마음도 조금씩 중심을 찾아갔다. 그렇게 그곳에서 나의 일상을 살아냈다. 즐겁고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고, 마음에 간직하며.


지금도 배터시 파크를 떠올리면, 막혀 있던 숨이 쉬어진다. 나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준 마음의 안식처. 요즘에도 번번이 그곳을 떠올린다.


그러면 요동치던 마음이 어느새 잠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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