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 암흑기.
1.
그렇게 순식간에 나는 과학선생님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내가 주로 맡게 된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줄곧 과외를 해왔지만 주로 고등학생이었고, 초등학생은 처음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더 무섭다는 말들에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착했다. (정말 몇몇 빼고는.) 게다가 이론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과학실험도 같이 진행하는 수업이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름 재밌었다.
그리고 과학학원의 스케줄은 점심 이후부터여서 덕분에 나는 오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분주한 아침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딱인 출근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수험생에서 벗어나 나름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니 어찌나 자유롭던지.
첫 월급을 탔던 날이 떠오른다. 그동안 수고했던 나를 위해 빨간색 플랫슈즈를 한 켤레 샀을 때 얼마나 행복하던지. 그리고 백화점에 들러 부모님과 여동생 선물을 고르면서 어찌나 뿌듯하던지. 늘 짐이 되는 것만 같았던 큰 딸이 나름 돈을 벌어서 이제는 부모님을 위해 돈을 쓸 줄 알게 된 것 같아서 말이다.
2.
일을 하는 것도 점차 적응을 해 가고 다음 월급을 타면서부터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자연스럽게 적금을 들기 시작했다. 영국 워홀을 위한 적금이었다. 그리고 영어회화를 늘리기 위해 남는 오전 시간을 활용해서 회화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영국에 가기 위해서 배웠던 영어는 너무나 재밌었다. 늦은 밤 귀가할 때면 주로 버스를 타고 갔다. 146번 버스 앞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창문 너머로 영동대교 건너 저 멀리 남산타워나 불빛으로 반짝이던 한강을 바라보던 밤의 나날들.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나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는 게 참 좋았다. 그때가 서울생활을 제일 많이 즐겼던 때였다. 서울의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배우고, 친구들을 만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던.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몇 번의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친구들에게 주저하지 않고 밥값이나 커피값을 낼 수 있었던.
돈이 가져다주는 생활적, 심적 여유는 심히 대단했다.
3.
비로소 재밌게 사는 것 같았는데 그 여유도 잠시였다. 내 발목을 느슨히 감싸고 있던 줄이 어느 순간부터 팽팽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공부를 그만하기로 결정한 후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드셔서 일을 그만두시고 집에 있게 되셨다. 일을 하지 않으셔서 몸을 더 챙길 수 있으니 걱정을 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증세는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날엔, 아버지가 말을 어눌하게 하셨고 기억을 잠시 못하시거나 하셨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서 운전을 겨우 멈추셨다거나. 아니면 내내 집에서 누워서 주무시기만 하거나. 계속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될수록 내 불안은 더 가속화됐고, 내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종종 힘들었다. 급기야 그는 응급실에 갈 일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나는 여러 번 서울과 본가를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실 때마다 나는 흔들렸고, 아버지가 조금 괜찮아지시면 다시 기운을 차리기를 반복했던 시간들 속에 나는 종종 무표정으로 내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 영국에 갈 수 있을까.'
이하이의 한숨을 들으며 가장 무거운 숨을 내쉬던, 경제적으로 여유로웠지만 심적으로는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