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인간도 고양이처럼 제멋대로인 생명체인 건 마찬가지니까.
고양이는 매력적이다. 누구라도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진 않았다. 아니, 고양이가 아니라 어떤 동물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애완 하는 편보다는 애완 당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쪽이다.
그런 내가, 지금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두 고양이는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첫째 ‘요미’는 세상에서 제일 겁이 많은 고양이로, 일단 새로운 것은 뭐든 무서워하고 본다.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그 사람이 돌아갈 때까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절대 밖에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새 옷을 입기만 해도 놀라 줄행랑을 친다. 반면 둘째 ‘쿠키’는 고양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개’ 같다. 내가 부엌에 가면 부엌으로, 침대에 가면 침대로 따라온다.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 앞에 앉아 기다린다. 다른 짓을 하다가도 이름을 부르면 냉큼 달려온다. 가끔 면봉을 물어오는데 던져주면 아주 좋아하면서 다시 물어온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으면 쿠키는 옆에 와서 ‘우와, 우와!’ 하며 신나하고 요미는 멀찍이서 ‘으앗, 으앗!’ 하면서 무서워하는 식이다. 두 마리가 하도 달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양이는 이렇더라" 하고 말할 수도 없다. 실은 알았다 한들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고양이의 이상과 다르다고 이 녀석들을 어디 내 버리거나 다른 녀석으로 바꿔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정리 정돈도 못하고, 식물이든 동물이든 뭔가를 돌보거나 보살피는 일도 잘 못하고, 책임감도 별로 없다. 고양이를 키우기에 전혀 적합한 인간이 아니다. 누군가와 살기에도 적합한 인간이 아니고, 심지어 혼자 살기에도 별로 적합한 인간이 아니다. (쓰다 보니 내 미래가 좀 암울한 것 같지만) 그런 내가 지금 막 침대 왼편에 쌓아둔 책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는 고양이1, 발치에서 양말을 물어뜯는 고양이2와 함께 살고 있다. 이렇듯 살다 보면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도 종종 일어난다. 물론 고양이 입장에서도 ‘저 인간은 잘 놀아주지도 않고, 심지어 밥 챙겨주는 것도 자꾸 까먹잖아’ 하면서 불평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양이들은 인간을 ‘덩치가 조금 크고 다르게 생긴 고양이’로 인식한다고 하던데. 나야말로 저 녀석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괴상한 고양이’로 비춰지는 건 아닐까.
아무튼 고양이를 기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가끔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데, 별로 그럴 일은 아니다. 의외로 엄청나게 말썽을 부리고 무척 귀찮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편만 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늦은 밤 싸늘한 집에 들어와야 할 때나 주말 오전에 혼자 아파 끙끙 앓아야 할 때, 그럴 땐 살아있는 무언가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처음엔 이것들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같이 사나, 여러 번 막막했다. 고양이를 키우기 전까지의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 따위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밥도 못 챙겨먹는 이 두 생명체랑 살다 보니 이젠 뭐 못 할 일도 아니겠다 싶다. 겁먹었던 것보다 쉬웠다. ‘이 정도라면 결혼도 육아도 하려면 할 수 있겠는데?’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간단하게 말하자면 연애랑 비슷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어떤 생명체를 만나고, 그 존재가 내 삶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죽겠다. 곧 말썽을 부리고 문제를 잔뜩 일으킨다. 부딪히는 부분들을 조율한다. (고양이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양보해야 했지만) 그 이후엔? 그냥 같이 지낸다. 연애의 결말이 ‘그냥 같이 지낸다’는 것이 슬프게 읽히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예상한다. 요즘 이십 대 중반의 연애분자(?)들에게 분리불안장애라던가 뜨거운 사랑과 지루한 일상 사이 조율의 어려움 등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훨씬 더 했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 하지만 나는 곧잘 이렇게 말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은, 물론 연애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하나의 지점일 뿐이고, 인생의 완전한 변화를 가져올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 끝에는 결국 늘 그 자리에, 그러니까 ‘그냥’ 있어줄 존재를 얻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 고양이처럼.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저서 ≪잡문집≫에 실은 결혼 축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오리 씨,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도 한 번밖에 결혼한 적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별로 좋지 않을 때는 나는 늘 뭔가 딴 생각을 떠올리려 합니다. 그렇지만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좋을 때가 많기를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사실 인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양이를 키운다고, 연애를 시작했다고, 취업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게 좋아지는 건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에 빠졌다고 그때를 기점으로 모든 게 좋고 행복해질 리가 없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전보단 나아지지 않겠어? 외롭지도 않고. 음. 정직하게 답하자면 별로 그렇지 않다. 외로움은 해결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사람 때문에 그전보다 좋아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사람 때문에 더 나빠지는 부분도 생긴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어서 그전보다 나빠진 부분(위생 문제라든가 비싼 귀걸이 한쪽이 사라진다든가)만큼 그전보다 좋아진 부분이 분명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면 모든 것에 한결 너그러워진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좋을 때는 아주 좋고, 좋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조금 무심하다고 여길까? 하지만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를 할퀴거나 상처 내고 내 소중한 물건(혹은 마음)을 망가트려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또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고양이에게도, 애인에게도, 친구나 가족에게도 ‘그저 거기 있고 함께 지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부디 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인간도 고양이처럼 제멋대로인 생명체인 건 마찬가지니까.
고양이보다 더 제멋대로 사는
천방지축 일상들을 위하여,
우리는 모두 빛나는 예외 http://durl.me/cxea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