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더 많이 우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잘 우는 사람이다. 자주 우는 사람이기도 하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그렇다. 쉽게 터져 나오는 내 울음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지 않도록, “나는 눈물이 많아” 하고 바삐 고백하는 것이 누군가와 친해지는 과정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했을 정도다.
되도록 울지 않으려고 애썼던 날들도 있다. 책을 읽다 눈물이 나려 하면 책을 덮어버렸고, 얘기를 하다 눈물이 나려 하면 화제를 바꿔버렸다. 영화를 보다 눈물이 나려 하면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뭐야, 왜 사람을 울리고 난리야. 딴생각 해야지, 딴생각. 내일 할 업무가 뭐더라….’
다행히도 그게 멍청한 짓이란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의 싹을 잘라버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나는 점점 버석버석한 사람이 되어갔으니까. 차라리 좀 창피하더라도 마음 놓고 우는 사람으로 평생을 사는 게 나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 흐르고 흘러가다/ 툭툭 떨어지기도 하며.” 박준 시인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 ‘울음’이라는 글이다. 출근길에 별생각 없이 챙긴 이 책 때문에, 아침 지하철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 기억이 있다.
비단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은 다 울음과 비슷하다. 분노하는 것도, 미안해하는 마음도, 연민이나 동경이나 외로움 혹은 더 복잡한 마음들도…. 눈물이 눈에 고이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고인다. 흐르거나 터져버린다.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두는 것이 언제부터 부끄러운 일이 되었을까? 가슴이 벅차면, 운다. 외로움이 사무치면, 운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면, 운다.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보고 싶어져도, 운다.
어른이 될수록 감정이 메말라 간다는데 이 눈물로 말라가는 감정을 적실 수도 있을까. 나는 우리가 더 많이 우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울음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마 없을 테지만, 적어도 서로의 마음에 스밀 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