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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른백산 Jul 15. 2020

지리산에는 반달곰 70마리가 살고 있다

잘 모르겠을 땐 지리산을 가라 - 02

근사했던 지리산의 숲이 불연듯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돌변했다. 불규칙적인 바람, 바스락거리는 풀잎. 엉뚱한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식별되지 않는 숲속. 문뜩 지리산 반달곰이 떠올랐다. 




잠든 뒤, 몰래 활동을 하는 또 다른 자아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타는 버스에서도 도착 직전에 귀신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교통에서 나는 원하는 도착지점에서 눈을 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벽까지 달리는 밤 기차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을 뜨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일상복을 차림의 여행객이 많더니 점점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고, 짐칸에 커다란 배낭을 올려놓은 등산객들이 많아져갔다. 친구, 부부, 아버지와 아들. 관계도 유추가 가능했다. 밤 기차로 새벽에 지리산을 오르는 여정, 아마도 이 시간의 무궁화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아닐까

캄캄한 어둠 속, 규칙적인 가로등이 반복되다가 대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놀러 온 송정아와 오뎅꼬치를 사먹던 추억이 떠올랐다. 다비를 기다리다 불편한 찜질방에서 선잠에 들었었는데. 기차는 다시 흘러서 전주에 도착했다. 아직 전주에서 지내던 다비와 무한 안주 막걸리집에 갔었다. 테이블을 갈아치우듯 쏟아졌던 안주들. 잠깐은 즐거웠지만 결국 속도 정신도 뒤집어 놓은 그 자리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전주 막걸리집이 티비에 몇 번 나오더니 컨셉이 달라졌다. 지금은 보지 못할 풍경이 됐다. 논산역에 도착했다. 육군훈련소 가던 날이 떠오른다. 그 맛 없던 불고기집은 아직 영업 하려나. 아빠의 난감한 표정이 떠오른다. 가장 맛있는 걸 먹여주고 싶었을텐데. 익산역에 도착했다. 송이 자취방에서 하룻밤 묵었던게 생각난다. 김치찌개는 맛있었지. 그 시절 데려온 동동이가 벌써 노견이 다 되었는데.

다음 역은 구례구역입니다. 새벽 3시가 다 된 시간. 방송이 흘러나오자 우리 칸 전체가 활기로 들썩였다. 나는 다른 등산객들과 함께 내렸다. 코 속까지 시원한 공기가 지나갔다. 별이 총총 떠 있는 맑은 하늘. 도시를 떠난 게 드디어 실감났다. 어둠에 묻혀 희미해진 전깃불을 따라 지하도를 내려갔다. 벽에는 온통 지리산, 화개장터와 관련된 사진, 글귀, 시 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긴, 이런 곳에 고향이 아니라면 여행객만 찾아오겠지. 그래도 마침내 여행이 시작된다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정면에 내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대형 거울이 보였다. 배낭을 들고 서 있는 어색한 모습의 내가 보였다.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일하지 않는 구례구역은 온전히 등산객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대합실에 도착하자, 부산한 분위기. "성삼재 가는거죠?" 택시의 운전기사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지리산 종주 국민코스는 성삼재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곳 구례구역에서 성삼재까지 거리는 짧지 않았다. 물론 성삼재까지 걷는 일정으로 여정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지리산의 흙길 돌길을 기대하고 내려온 이들중에 반나절을 아스팔트길에 할애하고 싶은 이는 많지 않았다. 새벽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출발지점까지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비나 눈이 쏟아지는 이상기후가 아니면 이 시간 택시를 잡아 탈 수 있다. 이동요금은 한 사람당 만원. 삼십분 넘게 고불거리는 길을 따라 올라갈 것을 생각하면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는 금액이다. 

배낭을 택시 트렁크에 싣고 뒷좌석 가운데 앉았다. 한 차량 당 4인 만석이 원칙이다. 가을 끄트머리 산행이라 다들 한 두겹씩은 더 입은 탓에 어깨가 조금 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좌로 크게 기울었다가 우로 크게 기울었다. 대충 이십분 가량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무릎도 무릎이지만 귀가 먹먹해져왔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길도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생긴 길쭉한 간판 덕분에 끝이 났다. 성삼재 도착이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나를 마지막으로 내려주더니 어둠속으로 홀연히 사라져갔다. 캄캄한 어둠, 진짜 지리산과의 첫 만남이었다.

여럿이 함께 다니면 반달곰과 만날 가능성이 적어진다

 산행을 블로그로 공부한 나는 완전히 당황했다. 눈 앞에 펼쳐진 칠흙 같은 어둠. 안전을 주의하라는 led전광판만 잠깐 빛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아주 어둠만 존재하는 것이 나을지, led전광판이나마 비춰주는 것이 나을지 알 수 없을만큼 홀로 놓여진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는 나와 같이 내린 사람들 외에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등불에 의지하여 산행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되, 그래도 적당히 의지받을 수 있는 거리에서 장갑을 꺼내고 스틱 길이를 조절했다. 등산로는 완만한 경사에 잘 닦인 시멘트 길이었다. 그 위에 짚을 엮어서 만든 멍석이 길게 깔려 있어서 걷기도 좋았다. 왼편에 졸졸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새카만 어둠 속에 간간히 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에는 세 팀 정도가 함께 걸어갔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들, 아빠와 아들, 그리고 노부부였다. 3일이나 되는 시간, 계속 길을 가야 했으므로 내 페이스를 유지하고 걷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기준에 힘들다 생각되면 쉬고, 어느정도 쉬었다 생각되면 다시 걷기로 했다. 마라톤이나 트래킹같은 신체를 기반으로 한 여행에 있어,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규칙적인 체력관리는 필수다. 분명한 기준도 없이 걷는 다는 것, 내가 지리산 종주를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군데군데 서 있는 표지판에 의지하며 걸어갔다

땀 나고, 숨 차면 쉬었다. 필요한 만큼 쉬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하자 인근의 일행이 하나 둘 안보이기 시작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지라 기다려줄리 만무했고, 급기야는 어둠속에 반딧불처럼 희미한 다이소 전등을 하나 들고 외따로 떨어지게 되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이, 근사했던 지리산의 숲이(그것도 성삼재 초입에서) 불연듯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돌변했다. 불규칙적으로 불어대는 바람으로 바스락거리는 풀잎. 계곡 지류로 엉뚱한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 캄캄해서 식별되지 않는 숲속. 머릿속에 김형원이 이야기했던 지리산 반달곰이 떠올랐다. "일주일만 빨랐어도 반달곰 만났을껄?", 인터넷으로 읽은 쪽기사도 떠올랐다. '대한민국 정부는 생태복원을 목적으로 지리산 반달곰을 지리산 전역에 풀어 놓는다.' 반달곰은 어떤 모습일까? 키가 2미터 50정도는 되겠지? 한 손으로 허리만큼 두꺼운 나무를 부러뜨린다던데. 도망칠 때는 내리막으로 달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지? 먹을 걸 던지면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을까? 감히 동물원에서나 곰 비슷한 것을 구경한 것이 전부인 주제 지리산 반달곰을 무시하려 하다니. 가방에 방울 하나 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과거의 행동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바로 그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두 사람. 천천히 올라가던 노부부였다. 속으로 안도하고 속도를 늦춰 노부부와 적당히 거리두고 함께 가기로 하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지 채 한 시간이 채 안되었을 무렵, 첫 대피소에 도착했다. 노고단 대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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