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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06. 2022

당신의 가면 뒤 감춰진, 일그러진 민낯을 보고싶다면2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제목 속 감춰진 속뜻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1185


변호사랍시고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자며 진두지휘를 나섰던 변호사(설경구 분) 아버지가 정작 재수사를 통해 자신의 아들이 희생양으로 몰리자 그제서야 진실을 말해달라며 증인과 담임선생에게 호소하는 모습은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경찰 고위간부 출신에, 어떻게 죽은 지는 모르지만 죽은 아들 내외 대신 손주를 키우는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손주에게 사건의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빛을 발할 뻔(?) 했던 그의 첫 대사 ‘아이들은 조사해보셨습니까?’는 유리되고 만 것이다.(물론 첫 대사는 그런 가식적인 가해자 할아버지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훌륭한 연출과 편집 덕에 그냥 묻히고 말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평생을 경찰로 바르게 살아왔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며 입으로만 떠들고 자기 피붙이가 피의자임이 명확해졌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증인에게 위증을 교사하는 훈련사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자기 자식이 가해자였을 때 부모가 보이는 적나라한 민낯을, 나는 현장에서 몇 번이나 직접 목도한 바 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고 조직에서 쥐어준 사시미칼로 상대 중간 보스를 (전문용어로) 담그고 버젓이 현행범으로 구속되어 있었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뿌리고 절규하며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신파를 찍었다. 나는 순진하게 수갑을 찬 채 죄수복을 입고 뿔테 안경을 낀 눈으로 눈시울이 빨개져가는 그 녀석보다는 그 어머니가 더 가증스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내 속에서는 그 절규하는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똑바로 정신 차리라며 귀싸대기를 올려 부치고 큰 소리로 외쳐주고 싶은 마음이 더 거칠게 올라왔더랬다.

그 불쌍한(?) 어머니에게 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느냐고?


“당신에게는 이렇게 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라고.


맞다. 이 망작의 리뷰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본래 이 영화의 메시지였어야 할 바로 '그것'을 바로 당신에게 전달하고자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당신은 파국까지 가기 전에 분명히 그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 있을 기회를 몇 번이나 가졌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영화에서는 담임선생(천우희 분)의 입을 통해 어설프나마(제대로 표현되지 못했기에 이런 표현을 쓴다. 지못미) 변호사 아버지(설경구 분)에게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던진다.

영화에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실패했기에 내가 지금이나마 당신에게 이 영화를 통해 그 말을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한 달 좀 전에 내가 시작한 캠페인이 있다.


https://brunch.co.kr/@ahura/1052


련 사건에 대한 개요는, 이 영화처럼 아주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된다.


‘현역 목사가 말다툼 중에 일반인에게 저주의 기도를 내뿜고, 그래도 자기 분을 못 이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돌이 갓 지난 자기 아기를 들고 나와 상대방에게 던지려고 한 사건이다.’


팩트는 이것 하나인데, 이 이른바 현역 목사 아동학대 사건은 경찰에 고소가 접수되면서 일파만파 사건이 커지고 만다.


초동 수사관이 아이를 던지려고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갑자기 안드로메다 행성의 논법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 행위가 피해자에게 공포감을 유발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던가, ‘당시 현장에 상당수의 성인들이 그 행위를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라는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궤변을 늘어놓으며 무혐의 처분한다.


차라리 이 영화에서처럼 증거를 인멸해놓고, 아이를 던지려고 한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없지 않냐 증거라도 가져와봐라, 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건 영화보다 현실이 더 어이가 없다.


아이를 던지려고 한 행위는 명백한 아동학대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재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아이를 던지려고 한 행위라는 내용을 쏙 빼고 ‘말다툼할 때 현장에서 아기를 안고 있었다.’로 팩트를 조작하여 형사처벌이 아닌 가정법원에 보호처분 의견으로 사건을 축소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도 있었다.


그 경찰들의 직무유기와 비리행위에 대해 감찰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더니 경찰청 본청의 감찰 담당과 서울청의 감찰담당들은 저마다 자기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궤변을 내뿜는다.


“아이를 던지려고 한 행위에 대한 증거는 보고 싶지 않아서 제가 요청을 안했구요. 그러니까 증거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 경찰들을 살려줍시다.”


“아이를 던지려고 한 행위에 대해 협박죄로 고소하셨으니 아동학대 죄는 도저히 인지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그냥 그런 줄 아세요.”


이쯤 되면 영화가 오히려 굉장히 현실적이고 우리에게 벌어진 현실은 너무도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https://brunch.co.kr/@ahura/1061


국회 행정안전위원회(경찰청을 피감기관으로 둔 감시역할을 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이자 3선 위원실에 하필이면 그 지역구 경찰서에서 벌어진 이 작태에 대해 바로잡아달라고 제보했더니, 보좌관이라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경찰청 측에 다 알아봤는데, 피해자라는 사람이 조금 정신병자 같아요. 경찰청 측에서는 이건 단순히 임대인과 임차인간의 개인 고소사건이고, 이 피해자는 그냥 무조건 목사를 공격하고 피해를 주기 위해 고소한 거고, 해당 경찰들에 대해서 융단폭격식으로 경찰청 본청은 물론이고 서울청 감찰계에 찌르고 민원 넣고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봐요. 경찰청의 의견과 저도 같은 생각이구요.”


어느 쪽이 영화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당신이라면 구분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분명히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서울대 가지 못한 자식들을 의사 만들겠다고 변호사 만들겠다고 의전원에 로스쿨에 넣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서 자신의 인생까지 망가뜨려버리는 사례를 우리는 생중계로 생생하게 청문회 자리에서부터 법원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보고 들었다.


그것이 특정 상류층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국회의원을 하는 자들의 자식들을 전수 조사하자는 이야기에 모두 다 함께 함구하는 블랙 코미디로 끝나버린 것을 기억하는 자가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브런치의 작가라고 하는 이들에게 브런치 궐기대회라는 명목하에 함께, 파국을 맞이하기 전에 함께 잘못을 바꿔나가 보자고, 배가 암초를 향해 달리고 있으니 그것만은 막아보자고 했더니, 영화에서 김홍파가 했던 것처럼 브런치 글에서는 온갖 정의로운 척을 다하며 사회참여적인 사람인 양 굴고, 광화문에 나가 촛불 들고 있는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고, 정인아 미안해를 해시태그로 몇 달째 올리는 쌩쇼를 했던 그들이, 꼬리를 말고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유도 참 다양했다.

나이가 먹었다고 퇴직하고 있다가 다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대단한(?) 기관에 다시 들어갔다며 운신이 어렵다는 같잖은 궤변부터, 갑자기 개인적으로 정신없고 바쁜 일이 생긴 사람은 그나마 양반이고(물론 드라마 리뷰 같은 것에 댓글을 달거나 하는 짓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자기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실천을 행하고 있으니 굳이 이 캠페인에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양심이 없다고 비난하지는 말아달라는 당당한(?) 변명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리도 다양한 변명과 핑계들이 퍼레이드를 다채롭게 펼쳐대는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영화를 빌자면, 초지일관 돈이 최고이고, 자기 자식이 최고이고 이기적인 병원 이사장(오달수 분)는 관객들에게 이미 ‘원래 그런 놈’이라고 인식되어 있고, 반전이 없다. 오히려 정의로운 척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며 거들먹거린 경찰 치안감 출신의 할아버지(김홍파 분) 같은 자가 더 가증스러운 것이다.


이 영화는 그래서, 진정한 범인으로 피해자에서 더 큰 악행을 벌이고 절친을 죽인 피해자를 가장한 가해자를 보여주는 반전을 선사한다.


국회에서 일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 어떤 젊은이가 내 글에 물었었다.


“왜 서울경찰청장까지 지내다가 국회의원이 된 빨간당 국회의원도 있건만 그곳에는 도움을 청하지 않으시고 파란당 국회의원실에서 제대로 바로잡지 않는 것에만 회초리를 드시는 겁니까?”


이런 자들이 파란당쪽에서 정치를 지망한답시고 그 구정물에서 고인물과 함께 섞여 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정치에 희망이 없다고 보고 그들에게 정치를 맡기지 말고 직접 나서자고 내가 브런치 궐기대회라는 것을 열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처음부터 초지일관 자기 자식이 잘못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아비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은폐하고 조작하려는 병원 이사장이 개과천선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경찰대 교수 출신으로 은퇴한 치안감 할아버지가 그나마 일탈을 보인 손주에게 귓방망이라도 날리며 일갈하거나 정신 못 차리는 학부모들의 잘못을 꾸짖는 어른 역할이라도 해주며 진실을 바로잡기를 아주 쬐금이나마 기대할 뿐이다.  


그렇지만, 강직한 경찰 코스프레를 하며 평생을 지내온 그의 가식적이기 그지없는 민낯은 오히려 그 어떤 학부모가 보인 지저분한 행동보다 더 리얼하게 관객들에게 공감을 자아낸다.


"간부랍시고 짭새를 했던 놈들이 다 그렇지, 뭐. 당연히..."


역대 경찰청장의 절반 이상이 감방에 가는 나라, 그 대한민국의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캐릭터를 통해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이다.


본래 왕따와 학교폭력문화의 메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에서 10년도 훨씬 전에 나온 이 문제작이 지금도 아무렇지 않게 대한민국의 현실에 녹아들어 설득력을 자아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봤던 보지 않았건, 이 글을 여유 있게 읽는 당신이, 정작 정치인들을 욕하고 그 자식들을 어떻게 해서든 의사나 법비를 만들겠다고 부와 권력을 이용해서 로스쿨과 의전원, 치전원에 넣으려고 했던 혹은 그렇게 해서 성공하여 부와 권력의 대물림을 이룬 그들을 욕하는 바로 당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무엇보다, 기회만 된다면, 돈이 그들만큼 있고 그들만큼 위로 올라가 그들의 콘체른에 속할 수만 있다면 나도 공부 못하고 찌질한 내 자식을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준비되어 있는 예비 범죄자이자 공범인 당신에게 이 영화의 리뷰를 빙자하여  꼭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이 글의 소제목에 쓴 것처럼(물론 당신은 그것조차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냥 눌러 스크롤을 내리고 있겠지만) 이 영화의 제목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해석하는 내 분석에 의하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학교폭력을 일으킨 가해학생들의 부모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지 알고 싶다는 도발적이고 항의적인 느낌이 일차적이겠으나, 그 이면에 감춰진 의미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운 부모들의 교육은 과연 누가 한 것인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결국 영화에서 굳이 성인 흉내를 내는 다 큰 것 같은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으로 등장을 시킨 이유에는 부모가 가르치고 이끌어줬어야만 할 책임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한 장치가 깔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부모도 그러하고, 자기 자식이 죽어버려 손주의 가공할만한 범죄행위에 자기 아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할머니에게 경찰간부 출신 할아버지의 말은 그러한 의도를 대사에서 흘려준다.

"없는 자식 생각하지 말고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손주나 잘 키웁시다."


반어다. 제대로 못 키우고 계속 그렇게 만든 자는 바로 그들이라는 것을 십자가에 못질하는 대사에 다름 아니다. 결국 가해자는 친구를 못살게 굴며 죽음까지 몰고 간 중학생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잘못된 것은 해서는 안된다고 따끔하게 가르쳐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해 놓고 오히려 사고 친 것을 은폐하고 조작하려고 한 부모들이 범인이라고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을 통해, 그것을 계승되고 학습되며 악화로 구축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그 학부모들 역시 그들의 부모에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그저 '오냐오냐' 키워졌기에 그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한국에서 가장 무섭다는 부모의 욕이 등장하는 바로 이런 말이 이 제목의 속뜻임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도대체 너를 이따위로 키운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얼굴이 보고 싶다!"


하지만 영화 속 반전보다 더 리얼한 현실의 반전은, 그런 가식을 너무 오랫동안 가면으로 쓰고 있어 이내 그 가면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슬픈 현실에 있다.

 

당신은 아직도 이것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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