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ug 13. 2021

다른 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하여

잘못 알고 떠벌인 제자를 성인이 가르치는 방법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柏, 周人以栗, 曰使民戰栗." 子聞之, 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애공이 재아에게 社에 관하여 묻자 재아가 대답하기를 "하후씨는 소나무를 사용하였고, 은나라 사람은 잣나무를 사용하였고, 주나라 사람은 밤나무를 사용하였으니,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려고 해서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이라 따지지 않으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

재아(宰我)는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공자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제자 중에 으뜸으로 꼽히는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재아의 초상화

노나라 출신이었고,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으로 자공과 함께 '변론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공자 문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실리주의적 인물로 그려지지만, 도덕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예와 도덕을 중시했던 공자로부터 자주 꾸중을 들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것이 3년상에 대해 스승에게 대들듯이 논쟁을 했던 것과 공부하지 않고 낮잠을 자다가 스승인 공자에게 들켜 꾸지람을 받는 대목 등 다양한 사례가 <논어>에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공부하지 않고 낮잠 자다가 걸려, 공자에게 말만 잘하는 인물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받는 公冶長 10장

그런데, 이 장에서는 그렇게 말을 잘하는 재아가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마치 사실인 듯 설명한 잘못(재아의 성향상 아마 실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을 나중에 공자가 듣게 된 상황이다.

사실관계부터 명확히 설명하자면, 주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3대의 社가 똑같은 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옛날 社를 세움에 각각 그 토질에 적당한 나무를 심어 社主로 삼았기 때문이다. 재아는 또 '주나라가 밤나무를 사용한 이유의 뜻이 이와 같다.'라고 말하였으니, 아마도 옛날 社에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그 말을 부회한 것일 것이다."  

주자의 해석을 보더라도, '주나라가 밤나무를 사주로 사용한 것이 백성들을 전율케 하기 위함'이라는 재아의 해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만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은 스승 공자의 평가가 이 장의 실제 방점이다.

참, 제자를 일깨우는 방법도 공자스럽다는 생각을 또 한 번 갖게 하는 부분이다.

문면상의 내용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지금 나무라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언을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차라리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꾸짖으면 덜 아플 듯한데, 지금 탓해봐야 아무 의미 없으니 탓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문법이 지극히 '공자스럽다.'

  

成事·遂事·旣往의 세 가지가 가리키는 사실은, '지나가버린 일'이라는 표현을 각기 다르게 세 번이나 표현한 것일 뿐이고, 그에 맞물리는 不說·不諫·不咎의 세 가지 행위가 가리키는 바도 결국 '(탓해봐야 의미 없으니) 탓하지 않겠다.'라는 같은 뜻을 반복한 것이다.

혼내지 않는다고 하면서 때린 데만 골라서 또 때리는 이 소심한 듯 치밀하기 그지없는 설법은, 알아듣는 자에게 있어 그 파괴력이 배가되는 무시무시한 신공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제자인 재아의 터무니없는 잘못으로부터, 어찌 되었든 간에 스승인 공자가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공직에 나아가 잘못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무어라 할 것도 아니다. 스승인 공자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이와 같은 경계를 던져준 것에 대해 그렇게 말재간이 뛰어났던 재아가 듣고 나서 얼마나 얼굴이 붉어졌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스승은 다시 한번 큰 가르침을 준다.

그 잘못에 대해 연연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더 신중을 가하라고.

'이미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더 탓하지 않는다'는 말의 무게는 그래서 무겁기 그지없다.

이 이야기는 '타증불고(墮甑不顧)'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타증불고(墮甑不顧)'는 '떨어진 항아리(시루)는 되돌아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후한서(後漢書)>의 '곽태전(郭泰傳)'에서 유래된 이야기이다.


후한 때 '맹민(孟敏)'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맹민은 산동의 거록(山東巨鹿) 지방 출신으로 집이 가난해 타향살이를 하면서 항아리(시루)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시루를 등에 짊어지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려 왕창 깨져버리고 말았는데,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걸어갔다.

당시 존경받는 대학자였던 곽태(郭泰)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시루가 깨졌는데 어찌해 돌아보지도 않으시오?"

그러자 맹민은 이렇게 답했다.

"이미 시루가 깨져버렸는데 돌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에 곽태는 자신의 우문에 현답으로 응수한 그가 대범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문하로 들어와 학문을 제대로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한다.

항아리를 팔아가며 노모를 봉양하던 맹민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에 일가를 이뤄 10년이 지나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고 훗날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이미 벌어진 일을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 결코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게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장의 공자가 제시하고 있는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제시는 이전의 잘못을 탓하기만 하는 교육방식을 뛰어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던 작던 살면서 실수를 하게 되는 일은 다반사이다.

실수도 그렇지만, 잘못을 하게 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실수가 되었든 잘못이 되었든 그것은 인간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대처하고 수습하고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공자가 이 장에서 강조한 부분도 바로 그다음의 단계를 강조하기 위해 이전을 덮을 것이지,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냥 넘어가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 탓하고 비난하기만 하는 것은 개선이나 발전의 여지를 저해할 수 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을 심하게 꾸짖기만 해선 아이가 당황하고 겁먹을 뿐이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이 들어가서 아이에게 감정을 내뿜는 우를 범해서는 내 자녀를 보다 큰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없다.

가장 핵심은 그 아이가 그것이 왜 잘못인지 스스로 인지하게 하고 그러한 잘못을 다시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깨닫게 하며 앞으로 그런 잘못을 또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깨우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이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훈육에 감정이 개입하는 순간

당신은 부모도 선생도 아닌,

그저 똑같은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 전락할 뿐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가 하는 것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생이 하는 것처럼

잘못된 위정자에게 엄격한 대중이 하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당신이 잘못된 상대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싶은지만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그다음 단계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르침을 줄 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신이 무엇을 일깨워주려고 하는가이다.

본질을 잊지 말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