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ug 25. 2021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조차 당신에겐 없다.

"도대체 仁者란 무엇이란 말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

子曰: "惟仁者能好人, 能惡人."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仁者여야만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책을 펼치면 황금이 쏟아지리니...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간략한 문장이다.

논어를 강독하면서 늘 강조한 바 있다, 짧고 특별할 거 없는 뻔한 해석일수록 어려운 문장이라고.

맞다, 어려운 문장.

한문 좀 읽었다고 목에 힘 좀 주고 다니는 이들이, 이 장을 '仁者의 자격'으로 해석하곤 한다.

내 말투를 보고 예상했겠지만, 당연히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설픈 해석이다.


이 장은, 仁者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는 의미를 설명하고자 해서 한 말이 아니다.


먼저 주자가 뭐라고 이 장을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고 힌트를 얻어보자.

 

"대개 사심(私心)이 없은 뒤에 호오(좋아하고 미워함)가 이치에 맞을 수 있는 것이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그 공정함을 얻었다.'는 것이 이것이다."


본문에 나오지 않은 핵심 개념어가 하나 툭하고 튀어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私心).

공자가 하지도 않은 개념어까지 넣어가며 주자가 멋대로 해석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그래서 유씨(游氏)가 이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소해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천하의 똑같은 심정이다. 그러나 사람이 매양 그 올바름을 잃는 것은 마음이 매여 있는 바가 있어서 능히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仁者만이 사심(私心)이 없으니, 이 때문에 제대로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仁者만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仁者만이 선악에 대한 명확한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결국 자격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맞지 않냐고 끝까지 우기는 멍청한 자가 있다면, 슬쩍 그 자에게, "그렇다면 사심(私心)이라는 개념은 왜 나온 것인지요?"라고 물어보라. 대답할 수 있는 밑천이 그에게는 없을 것이다.

유씨(游氏)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심(私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사욕으로, '마음에 매어있는 바'라고 설명하면서 그 속성으로 '사람이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선을 긋는다.


이것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일반인과 仁者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비교와 대조는 설명의 명확함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修辭)이다.

"도대체 仁은 무엇이고, 仁者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매번 사람들은 묻는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개념과 비교나 대조를 해주면 이해가 쉽다.

그래서 유씨(游氏)는 그 방법을 택해서 공자가 말하는 仁者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준 것이다.


사람들도 뭐가 옳고 어떻게 하면 옳은 것인지를 아예 모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이 설명은 출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늘 먼저이고, 그 이익이 보이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올바름을 잃게 된다, 그것도 매번.


그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우선하려고 하는 짐승 같은 본능을 수양을 통해 극복하여 체화한 이가 바로 仁者라는 설명을, 공자는 상세한 설명 없이 일언이폐지하고 툭 던져준 것이다.

그걸 알아들을 수준의 사람들만 알아들으라고.


<논어>에서 너무도 뻔한 내용으로 짧고 굵게 이루어진 장들, 대개 공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내공을 지닌 자들에게 던지는 화두 격의 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공자의 가르침은 그것을 설명해줄 때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지만, 이해하는 것에서도, 표면만 이해하는 자부터 그 행간을 읽고 감탄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층위가 다양해진다.  

이 장의 내용은 위와 같이 <대학>에서도 동일한 어구로 언급되고 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仁者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조차 없다는 의미이다.


이 말 역시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공자의 기준에서 보면, '자신이 선을 구현하지 못하는 수준의 인물은 선이나 악에 대해 판단할 자격도 없다.'는 의미로까지 외연이 확장된다.

예컨대, 사법비리의 온상에서 주범으로 활약하고 있는 검사나 판사 놈들이 누군가를 기소하고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에 다름 아닌 셈이다. 형님 동생 하면서 술집에서 질펀하게 돈 주고받은 경찰간부 놈들이 수사권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닌가?


원래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인 사심(私心)에 얽매여 올바름을 잃어버린 자는 결코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명쾌한 논리이다.

이인 편을 시작하면서 仁과 仁者에 대한 개념이 나오고 설명이 이어지자, 독자들이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이건 나의 단계도 아니고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그런데,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仁者가 되는 것은, 그리고, 仁을 갖추는 것은 아주 쉽다는 것을 이 장은 다시 역설한다.


즉, 사심(私心)에 얽매어 올바름을 어기고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게 되면 仁者가 되는 길에 한 걸음 크게 다가서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논어강독을 하면서 누차 강조한 바 있다.

결국 이 사회를 좀 먹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의 그 안일함 때문이라고.

그것을 수천 년 전 <논어>를 읽은 이들은 고상하게 사심(私心)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다 하잖아?


교수사회에서 교수들끼리 서로 자식들 챙겨주고 품앗이하는 건 나쁜 거 아니잖아?


판검사 출신 아빠랑 달리 돈만 많은 엄마 쪽 닮아서 애가 머리가 나빠 사시에도 패스를 못해, 그러니 로스쿨 만들어서 돈을 발라 변호사 시험 합격시킨 다음에 아빠들 로펌으로 서로 품앗이해서 받아주면 좋겠네.


대학병원에 근무하면서 내가 그것도 못해주랴? 의사들끼리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줄 거야?


우리가 돈이 없지 명예가 없나? 그래도 소위 고위 공무원인데, 판사가 되었건 경찰청 간부든 농수산부가 되었던 외교부랑 결탁해서 자리 만들어서 해외에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코에 외국 바람 좀 넣는 건 괜찮은 거잖아?


이따위 썩어빠진 당신들의 사심(私心)이 모이고 모여 이 사회를 이 모양 이 꼴로 말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이 '仁'을 공자시대의 고리타분한 먼지 나는 개념이라며 골방에 집어던져두고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드는 바람에, 저 개념은 결단코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라고 꼴값을 떠는 바람에, 나라가 이 꼴이 되었고, 사회가 이 꼬락서니가 되어버렸단 말이다.


당신들에게는 양심은 없고 사심(私心)만 가득 하단 말인가?

그렇게 사심(私心)만 대물림하고 제대로 된 교육은 시켜주지 않으면서, 당신의 자식이 나중에 유산 배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당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달려들고, 자식들끼리 부모가 보는 앞에서 집안에 모아둔 양주병을 내던지며 싸우는 꼴을 어찌 보려고 지금 그따위로 살아가느냔 말이다.

그러지 말라고 이 장에서 공자는 말씀하셨으나, 결코 이런 공간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해석조차 얻어들을 기회가 없을 당신에게 내가 대신 외쳐준다.

"정신 차리고 그따위로 살지 마라!"


 



이전 08화 외적인 것들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가 당신의 레벨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