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재주를 어디에다가 쓰겠는가?

말재주가 뛰어난 것이 능력이라 착각하는 이들에게

by 발검무적
或曰: “雍也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라 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약삭빠른 말재주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어진 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雍의 초상

雍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冉이고 자는 仲弓이다. 곧이어 공부하게 될 <논어>의 제6편인 ‘옹야편(雍也篇)’에서 따로 언급될 정도로 비중을 갖춘 인물로, 스승 공자가 임금의 재목을 갖춘 인물이라고 칭찬에 마지않은 인물이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해설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중궁(仲弓)의 사람됨이 중후하고 소탈하며 과묵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으므로, 그가 덕에 뛰어남을 찬미하면서도 그의 말재주가 부족함을 흠으로 여긴 것이다.

당시 뭇사람들이 제자 雍에 대해 그런 식의 평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스승 공자가 탄식하며 말한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이 말을 앞과 뒤에서 두 번이나 한다. 직격탄도 아니고 훨씬 더 아픈 돌려치기를 그것도 두 번이나 했을 때는, 행간의 숨은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자들은 정신이 혼미하여 죽을 지경의 그로기 상태가 될 수 있는 말이다.

먼저, 이 말의 의미를 주자는 어떻게 해설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말 잘하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말 잘하는 사람이 남에게 응답하는 것은, 단지 입으로 약삭빠르게 말하여 이기기를 취할 뿐이요, 실속이 없어서 한갓 남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많은 뿐이다. 내 비록 중궁이 仁한 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의 말재주 없음은 바로 훌륭함이 되는 것이요, 흠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다시 말씀한 것은 깊이 깨우치려고 하신 것이다.

깊이 깨우치라는 말 정도가 아니라 정말 폐부를 치르는 촌철살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쓰는 말로도 “그걸 뭐에 쓰겠느냔 말이다”라고 하는 말은 강도가 결코 약하지 않음을 상기한다면 이 말은, “그 따위 것은 오히려 저해가 되는 요인일 뿐이다.”보다 훨씬 더 쎈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미있는 주석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제까지 <논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것은 잘 알지 못하겠다’라는 공자의 어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한 부정을 공자식으로 돌려 쳐서 말할 때 쓰는 어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을 눈치챈 어떤 학생이, 공자가 옹에 대해 칭찬해놓고서는 어째서 허여해주지 않았느냐고 주자에게 시비성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시비를 호락호락 받아줄 주자가 아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혹자가 의심하기를, “중궁(仲弓)의 어짊으로도 夫子께서 그의 仁을 허여하지 않으심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仁의 道는 지극히 커서 전체가 仁이고, 그침이 없는 자가 아니고서는 이에 해당될 수 없다. 顔子(안연)와 같이 성인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도 오히려 3개월 후에는 仁을 어김이 없지 못하였다. 하물며 중궁이 비록 어질다고는 하지만, 顔子(안연)에는 미치지 못하니, 성인께서 진실로 가벼이 허여하실 수 없는 것이다.”

아! 진실로 공자의 숨은 뜻을 꼼꼼하게 새겨 <집주>를 만들만한 인물의 답변이다.

맞다. 仁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듣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이룬 성인에게서 그것을 허여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궁극의 일인가를 잘 설명한 대목이다.

임금이 될만한 자질을 갖췄을 정도의 덕을 갖췄다고 한, 중궁(仲弓)마저도 仁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얻어내기에는 조금 부족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 비교의 대상으로 공자가 가장 아끼고 아꼈던 안연의 고사를 언급한 것은, 그야말로 할 말없게 만드는 빼박 객관적 근거라 하겠다.

자아,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공자의 제자 雍이, 말이 어눌했던 것까지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과묵했다는 정도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이를 훌륭하다고 여겼는데 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사람됨은 괜찮은데 말재주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이라면 흠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말을 많이 하고 이 말 저말로 자신을 변명하고 거짓말하며 일을 꾸미는 자들은, 결국 말을 많이 함으로써 자신의 신세를 망치지 않았던가?


옛말에, ‘가만히 있으면서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다.

범인을 체포하여 자백을 받아야야 하는 긴급 취조를 할 때 형사들의 입장에서는 말이 많은 범인을 만나면 반가워한다. 그런 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수려한 말재간에 의지해서 거짓말을 잘해서 혐의를 벗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인간인 관계로 실수가 나오고, 특히 그 말들이 거짓일 경우에는 논리적 모순이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만다. 오히려, 형사들이 취조할 때 가장 곤욕스러운 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자이다.

그래서 사기죄로 잡혀오거나 동종 사기 전과가 많은 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1988년 5공청문회의 스타 탄생 순간

우리는 말을 잘 못하거나 어눌한 정치인을 본 일이 거의 없다.

달변이 정치인에게는 필수적 요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들은 수없이 공약을 남발하고, 개인적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하며 함부로 약속을 내뱉는다. 물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측근이라고 하는 이들 간에 폭로전이 터지며 서로 자폭하는 사례로 비근하게 목도하곤 한다.


공자가 이 장에서 말씀하신 핵심은, 말을 잘하는데도 부러 말을 못 하거나 바보같이 굴라는 의미가 아니다. 순서의 문제이고 우선의 문제이다.

인격을 수양하여 자신의 품격이 말에 담겨 나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 말 저말 내뱉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고 수순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고, 잘못된 이들을 지적하는 청문회장에서 어눌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인정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 알고, 말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라는 말이다.

말을 잘하는 이와 말을 그저 많이 하는 이는 확연히 다르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방송을 통해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도장을 찍어 '인지도'라는 것을 만들어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족속들이 오늘도 종편을 가득하게 채운다. 그들의 전문분야도 아닌, 세계 소식이나 가십뉴스 원고까지 그들은 버젓이 시키는 대로 읽으며 방송에 어떤 식으로든 얼굴을 들이밀려고 한다.


자기 집안 고부갈등이나 남편, 마누라 욕하는 지저분한 방송과 전문가 입네 하고 앉아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자기 개인적인 생각을 지껄이는 이들과의 차이를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정작, 사회의 부조리에, 자신이 속한 조직에, 자신의 가족 친지가 돈을 더 먹겠다고 벌인 비리에 입을 꽉 다물고 침묵하는 그들의 말하기 방식이 토악질이 날 정도로 역할뿐이다.

그래서 말재간만 벌이는 이들과 필요한 것을 말하는 자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고 싶은가?

아주 쉽고 간단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그가 무엇을 위해 입을 여는가를 보면 간단히 파악해낼 수 있다.

궁극적으로 어떠한 목적을 가진 담화는 반드시 그 의미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고단수의 도적놈들일수록 자신의 발화 목적을 감추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둔다.

그런데 요즘 법비들이나 정치꾼들의 수준은 고단수도 되지 않아 그 수가 빤히 보이니, 그것을 알아내고 읽어내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유튜버들을 보라.

그들의 발화 목적은 단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