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평가함에 있어 나는 얼마나 냉정한가?

애제자일수록 혹독하게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

by 발검무적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자께서 자공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안회 가운데 누가 더 나으냐?”하시자, 대답하기를, “제가 어떻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안회만 못하다. 나는 네가 안회만 못하다는 것을 허여한다.”

늘 이 장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불편하다. 심지어 약간 불쾌한 느낌까지 든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사람 읽기 전문가' 공자가 그것도 수제자급에 해당하는 상위 랭커의 자공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이 장이 갖는 의미가 깊이 있고 곱씹을 것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여기서 주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다른 제자와의 비교를 대놓고 물었다는 것이다. 정작 이런 돌직구 질문을 받은 자공의 태도와 대답하는 방식과 내용도 유의해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이런 질문을 했다가는 불쾌하다면서 항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 같은 스승이 에둘러도 아니고 바로 대놓고 여쭤보시니 그저, ‘제가 제일 바보입니다요.’라고 굴욕적인 항복의 자세를 취할 것인가?(경성제대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파문당한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실, 며칠 전에 공부한 장에서, 이미 자공이 여러 면에서 자신의 평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비교를 통해 분석하고 언급했던 것으로 유명했음을 설명한 바 있었다.


이 장의 파격적 질문방식은 그러한 자공의 태도가 약간은 못마땅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리석거나 수준이 낮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던 스승이, 그에게 더 큰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일부러 택한 방법이다. 즉, ‘네가 그렇게 비교하여 평가하는 방식을 즐겨하니 너의 방식으로 내가 너에게 가르침을 주마.’ 단, 이 질문의 방식은, 단순한 가르침을 주기 위함 뿐만 아니라, 자공의 수양레벨을 테스트한다는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누구라도 처음 이런 돌직구 질문을 받으면 불쾌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자공이 누군가? 그는 스스로의 이상을 구현한 안회(顔回)와 대비하여, 제자 중에서도 언변의 대가로 꼽히는 인물이었고, 외교능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다분히 프로다운 모습으로 말하면서 소박한 내면의 진실을 잃지 않는다는 평가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안회(顔回)의 초상

실제로, 안회(顔回)는 공자보다 30살이 어리고, 자공(子貢)은 31살이 어렸으니 자공(子貢)은 안회(顔回)보다 한 살이 어린 동생이었다. 비슷한 동년배의 능력까지 출중한 제자들은 공자의 총애를 받았던 탁월한 동량(棟樑)들이었다. 일전에도 언급했었지만, 요절한 안회는 제자들 중에서도 이른바 ‘넘사벽’의 존재였다.


다들 벼슬 한자리 차지하겠다고 그렇게 공부하는데, 그 공부의 목적을 넘어, 먹을 밥하고 물 한 모금만 있으면 나는 행복하다며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말하고,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 행동하는 사람을 누가 감히 뛰어넘을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그것은 스승 공자만의 편애에 의한 것이 아닌, 자타가 공인한 부동의 1위였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안회(顔回)의 고사

이 장이 평범하지 않고, 숨은 뜻이 깊어 괜한 사설이 길었다. 본문으로 돌아와 보자.

스승의 갑작스런 돌직구 질문에 자공은 스승의 의도를 파악한 듯 스승에게 배운 대로 비유적인 방식을 통해 대답한다. 자공이 어떤 수 읽기를 순식간에 하고서 대답했는지 주자는 이렇게 해설한다.

一은 수의 시작이요, 十은 수의 끝이다. 二는 一의 상대이다. 顔子는 밝은 지혜가 비추는 바로 시작을 가지고 끝을 알았고, 자공은 추측하여 알아 이것을 인하여 저것을 알았다. (선진편에) 공자께서 ‘내 말을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顔子를 칭찬한 것과 (학이편에) ‘지나간 것을 말해주니 말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자공을 칭찬한 것이 그 증거이다.

생략이 되어 있는 부분을 내가 부러, '선진편''학이편'이라고 괄호에 넣은 것은, 안연을 평가하면서 ‘先進편’ 3장에서, 주자의 해설 뒤에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다. 나의 말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구나.’라는 내용을 언급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고, 자공을 평가하면서 했던 주자의 해설 뒤에 ‘사(자공)는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말해주면 말하지 않은 것을 아는구나.’라는 내용이 학이편에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즉, 이미 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사례들이 있어, 그간 무슨 말들이 오갔던 것인지 자공 역시 모두 기억하고 파악하고 있음을 증명해보인 것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일러주지 않아도 첫마디에, 스승이 어떤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지 이해한 안연에 대해, 마치 탓하듯 감탄하고 칭찬했던 스승의 모습을 기억한 자공은, 자신에 대한 스승의 평가 역시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가르침을 그대로 기억하고 비유하여 자신과 안연의 수준을 또 다른 비유로 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논어> 전체를 이해하고 있는 이들조차 제대로 기억해내고 앞뒤를 파악해내기 어려운, 이 복잡한 대화의 깊이를 호씨는 다음의 해설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해준다.


“(헌문편에) 자공이 사람들을 비교 평가하자, 공자께서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하시며, 또 ‘너와 안회 중 누가 나으냐?’고 물어, 그가 자기 자신을 앎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신 것이다. 聞一知十은 上知의 자질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生知之之]의 다음이요, 聞一知二는 中人이상의 자질로, 배워서 아는 이[學而知之]의 재주이다. 자공이 평소에 자신을 안회에 견주어 따라갈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비유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夫子는 자공이 자신을 앎이 분명하고 또 자기를 굽히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또 거듭 허여하신 것이다. 자공은 이 때문에 끝내 性과 天道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었고, 비단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 주자부터 호씨까지 이 얼마나 대단한 선배들인가! 호씨의 설명처럼, 자공은 멋지게 스승의 테스트에 통과한다. 때문에 자공의 대답에 대해, 스승 공자는 말한다.

“네가 안연만 같지 못하다는 (그 대답을) 허여한다.”

사실, 이 마지막 공자의 대답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구문이다. 나 역시 처음 이 장을 공부할 때, 이 해석에 막혀 그 의미를 제대로 풀어내고자 일주일이나 고심했던 젊은날의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이 마지막 공자의 대답은 새기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공부를 좀 했다고 하는 후대의 학자들조차 이 부분에는 이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맨 위의 원문해석 방식은 주자와 내가 해석한 방식이고, 다른 학자들은(도포 차림에 머리 빡빡 깎고 논어 강연으로 돈을 많이 번, 전직 K대 철학과 교수이자, 한의원 차린 그 양반을 포함하여) 마지막 대답에 대해 공자에 대해 지나친 경건주의에서 유래된 오석일 확률이 높다는 식으로 봤다.


즉, 아무리 공자가 시니컬하기가 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자신이 부족하다는 제자에게, ‘그래. 네가 그만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주마.’라고 확인사실을 한단 말인가?라고 하는 의견에서 ‘너와 내가 모두 그만 못하다.’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이 마지막 공자의 대답은, 그런 자기중심적인 현대의 단편적 사고로, 혹은, 범인(凡人)들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논어>를 고작 백번도 채 안되게 읽는 게으름을 피웠기에 그런 헛발질이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與(허여한다;인정한다)에 해당하는 목적어는, ‘네가 그(안연)만 못함을’이 아니고, ‘네가 너에 대해 그렇게 평가한 그 대답을’이다.

이미 주자도, 호씨도 그 의미를 읽었기에 길게 설명하지 않은 것을, 후대로 넘어오면서 그것을 도저히 읽어내지 못한 학자들이 지들 멋대로, 생략된 목적어도 제대로 찾아내 읽어내지 못하고 그저 편하게 ‘여(與)’를 ‘함께’로 해석하고, 공자가 그렇게 심하게(네가 그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주마) 말했을 리 없다라며 자공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까지 포함하여 그렇게 ‘너와 나’ 모두가 그만 못하다고 말했다는 황당한 해석을 한 것이라고 나는 파악한다.

그렇게 파악하는 근거를 더 제시해보라고?

좋다.

질문의 취지로 돌아가 보자. 공자는 이 장에서, 궁극적으로 자공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물은 것이되, 그 방식을 자공이 즐겨하는, 다소 공자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그의 방식으로 물은 것이다. 또, 이처럼 굴욕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제자 자공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엄정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에 대해, ‘비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데, 네가 좋아하는 그 비교를 통해서 너에 대해 평가해보거라.’라는 가르침과 테스트를 동시에 화두로 던진 것이다.

위에 호씨의 해설처럼, 자공은 객관적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대로 안연에 대해, 함께 공부했던 스승과 자신만이 기억하는 그 추억을 빗대어 자신에 대한 단계와 안연의 단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멋지게 대답해낸다.


그렇다면 그간 배운 것을 모두 복기하여 행간에 집어넣고, 스승이 가르쳐준 대로 비유의 방식으로, 그것도 한 살 차이의 라이벌을 인정하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이 멋진 제자에게 스승이 뭐라 답하겠는가? ‘그래, 네가 그렇게 레벨이 낮은 것을 인정한다.’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너의 그 제대로 된 답변을 내가 인정해주마. 훌륭한 대답이었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판단하는 또 다른 근거는, 위의 호씨가 설명해준 대로, 이 질문에 통과한 자공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단계였던 상위 과목에 해당하는, 性과 天道에 대한 스승의 특별 레슨을 받고 배울 수 있었던 점이다.


이 멋진 사제간의 형이상학적인 대화를, 평가절하하는 해석이 더 이상 없길 바라며 쓰느라 내용이 좀 길어졌다.


그래서 이 심오한 대화의 전말을 알고 난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마음에 남는 글귀 하나 옮겨 적는 것도 인색한 시대에 우리는 산다. 핸드폰에 모든 것을 녹음하고, 필요하면 그때그때 핸드폰에 적고 찍고 찾아보면 되니까, 무언가를 적고 기억하는 것이 더 쉽게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당신들의 삶이, 영혼이 더 윤택하고 따스하며 아름다운 사회로 향해하고 있는가?


메모지에 적고, 일기장에 적고 책의 빈 공간에 적고 하는 일도 없어졌는데, 당신의 마음에 꼬옥꼬옥 눌러 적는 일은 하물며 남아 있겠는가 싶다.

스승이 가르침을 주시며 어떤 상황에서 무어라 하셨는지, 내 라이벌에 대해 뭐라 평가했었는지, 나는 그 평가와 가르침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노트와 일기장에 적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마음에, 내 머리에 하나하나 새겨 놓았어야 할 것을 놓치고 살진 않았던가?


옛날 그 옛날, 흑연의 품질이 좋지 않아, 연필이 잘 안 써진다고 침을 발라가며 귀한 종이에 한 자 한 자 배움을 적던 코찔찔이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저 시험에 나올 것을 공부하면서 공부한다고 생색내고, 그렇게 하는 공부마저도 지 출세를 위해 좋은 대학을 가고, 사시를 패스하고, 승진을 하고, 유학을 가는데 쓰면서 결국은 지 배를 불리고, 지 처자식의 배를 불리고, 자기 위세를 이용하여 뒷돈을 챙기고,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자기만 못한 학벌임을 욕하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끌어올려 부와 명예를 대물림하려고 발버둥 치는 그것들이 결국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지아비가 온갖 비리로 감옥에 들어가면, 동네 창피해서라도 반성하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것을 지아비의 자리를 채우고 들어가 그 이익을 유지하고, 행여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지 자식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지아비가 챙겼어야 할 것을 그들에게까지 챙겨달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지내는 지어미가 과연 무엇을 적고 기억했겠는가?


그런 부모를 보며 비싼 고액과외로 사시마저 패스한 자식들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혔겠는가? 그들이 대물림한 것인 부와 명예라고? 그들에게 과연 명예라는 것이 있기나 하단 말인가?


그들을 욕하며, 위에 있는 것들이 다 그렇다고 욕하는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제대로 적어가며 공부한 것을 토대로 실행하고 감시하고 부끄러움을 확실하게 줬더라면, 그래서 그들이 여의도에서 배지를 달고 목에 깁스를 하지 못하게 해 줬더라면 그들은 언감생심 그따위 행위를 못했을 것이고, 그 자식들이 부모의 위세로 호가호위하는 것에 대해, 공정한 사회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누군가 못 박고 제대로 지적했다면, 그 자식들이 그 따위로 미꾸라지처럼 흙탕물 투성이로 지저분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 가진 외제차를 부러워하고, 그들이 가진 강남 아파트를 못 가진 것에 대해 부러워하며, 그들이 가진 강남 빌딩을 부러워했기에 지금 이모양이꼴이 된 것이다. 그것들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그들에게 알게 하고 당신이 부끄러워했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란 말이다.


정작, 당신이 한 자 한 자 적어가며 ‘올바른 것’이 무엇이라고 공부했던 그 초심을 적은 노트는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당신이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초심들, 잊지 말아야 할 올바름에 대한 가르침과 기억들을 적은 그 노트를 어디에 꼭 감춰두었는지, 다시 찾아 읽어보라. 그리고 다시 당신의 마음에 꾹꾹 눌러 적어놓고 그 가르침들을 당신의 행동으로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한 번쯤은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