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랴!

진정한 가르침을 내놓으라는 무뢰한들에게 고함.

by 발검무적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이 말하였다. “夫子의 문장은 들을 수가 있으나, 夫子께서 性과 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다.”

이 장은, 처음 읽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의아해 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문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수업이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었지만, 性과 天道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 없었다니.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안 좋았다는 평가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감이 안온다.


게다가, 이전 11장까지의 내용이 사람에 대한 평가로 쭈욱 일관되다가 갑자기 자공이 스승 공자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라, 흐름도 당혹스러울 수 있겠고, 그 내용이 평가라고 하기에는 그저 사실관계에 대한 진술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겠다.

정자(伊川)의 설명을 통해, 결론부터 먼저 해석하면 이 장의 내용은, ‘자공(子貢)이 夫子의 지극하신 말씀을 듣고 탄미한 말’이다. 즉, 스승이 그렇게 하셨다가 아니라, 그야말로 정수가 되는 듣기 어려운 性과 天道에 대해 듣고 나와 감탄한 말이다.


앞서, 자공(子貢)이 안회와 비교하여 스스로를 평가하라는 스승의 테스트 아닌 테스트를 통과하여 性과 天道에 대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을 이미 공부한 바 있다. 그 가르침을 받고 나서 진정한 감탄과 감동을 받은 자공의 감상을 그대로 실은 내용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인 것이다.


때문에 이 장은, 공자에 대한 수제자의 평가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 장은, 공자의 사상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구체적이고 즉물적인, 실천중심의 철학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현대의 고문을 공부하는 이들이 약간 견강부회하면서 그 뜻을 잘못 새긴 부분이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또 드는 부분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주자가 이 장에 대해서 해설한 내용을 보면서, 본래 자공이 말하려던 의미와 평소 공자의 사상을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文章은 德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위의(威儀)와 문사(文辭)가 모두 이것이다. 性은 사람이 부여받은 天理요, 天道는 天理自然의 본체이니, 그 실상은 한 이치이다. 夫子의 문장은 날마다 밖으로 드러나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함께 들을 수 있으나, 性과 天道에 있어서는 말씀을 적게 하시어 배우는 자들이 들은 수 없었다. 이는 성인의 문하에서는 가르침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으므로, 자공(子貢)은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얻어듣고는 그 훌륭함에 감탄한 것이다.”


문장은 글쓰기에 해당하는 것이고, 실제로 쓰는 것이기에 겉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른바 형이하학에 해당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실제 행동에 해당하는 위의(威儀; 위엄 있는 행동)를 문사와 동일 위상으로 함께 넣은 것은 그 이해를 돕기 위함이다.


그런데 性과 天道는, 주자의 설명처럼 天理와 天理自然에 해당하는 것들로, 말로 설명할 수는 개념이 아니고, 실례를 몸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닌,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형이하학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줄 수 있는 것임에 반해, 형이상학에 대한 것은 아무리 구체적으로 떠든다고 하여도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특히, 형이하학을 마스터한 이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주자는, 공자의 문하에 있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뛰어넘을만한 이들이 없어, 쉽게 들을 수 없었던 것을, 그 미묘한 등급을 넘어선 자공이 얻어들을 수 있었고, 막상 그 형이상학의 개념에 대한 가르침을 얻고 나자 그제야 감동과 감탄을 했다는 아주 상세한 설명이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용어가 나왔는데, 위에서 ‘등급을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엽등(躐等)’이라는 단어이다.


내가 엊그제와 어제에 걸쳐 설명했던 수영으로 설명하자면, 수영장은 등급별 레인이 있다. 그런데 그 레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이들의 수준이 각기 다르다.


예컨대, 한체대 수영국가대표들이 훈련하는 수영장의 수준과 그저 물에서 움직이고 걸어다는 수준의 일반인들이 다니는 수영장이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다니는 수영장에 가더라도 상급 레인부터 초보자 레인까지 또 등급을 나눈다.


수영장을 처음 가서 물에서 숨쉬기조차 제대로 못 배우고, 얼굴을 물에 넣었다가 빼며 ‘음’, ‘파’를 하는 이에게, 한체대에서 국가 대표로 접영을 하는 이가 좀 더 자연스럽고 돌고래에 가까운 그 무언가 단계를 넘어서는 가르침을 말로 아무리 설명해줘도 알 턱이 없다. 그 일반인 수영장의 처음 초보자 레인에 들어온 사람이 중급자 레인을 거쳐, 상급자 레인에서 모든 영법을 마치고 체력까지 갖춰, 한체대 수영장에서 한국 대표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논어>에서는 ‘엽등(躐等)’이라는 한 마디 말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부하는 자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금기안을 강조한다.(앞서 공부하면서 이미 한번 언급한 바 있다. 처음 본다고 생각하는 이는,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좀 꼼꼼히 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자의 위 주석에서 그 실마리이자 눈깔자라고 보아도 무방할 한 마디. 문장에 대해 말하며 性과 天道에 대해 설명한 후, 무심하게 그것들을 정리하는 듯한 한 마디.

“그 실상은 한 이치이다.”

어떤 것은 말하고, 어떤 것은 일부러 말하지 않고 감춰둔 것이 아니라, 늘 말하고 가르쳐주었으나 어떤 것은 바로 드러나는 내용이라 보이는 것처럼 보이고, 더 공부하고 높은 경지에 올라서야만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그 안에 함께 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처음 공부하는 자들은, 혹은 형이하학부터 공부한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논어>에 보면 공자는 모두 말해주었다고 하는데, 묻는 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묻거나 엄한 소리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공자는 성인이다. 성인이었던 공자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그래도 동양철학 사상을 통틀어 성인의 바로 밑의 등급까지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맹자에 가면, 性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그것은,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제대로 펼치기 위하여 그 인정(仁政)의 내용을 이루는 도덕주의의 선험적 근거를 인간성 자체 내에 발현하기 위한 노력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맹자는 도덕적 인성 내에서 확보되어야만 그 인정(仁政)에 대한 주장의 보편성과 필연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위의 자공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고, 스승 공자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와 그간 스승의 깊은 뜻과 가르침이 깨달음으로 왔기에 진정 감탄하여 한 말이다.


공자에게 수제자에게만 알려주려고 감춰둔 비전(祕傳)의 진리란 없었다. 다만,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등급까지 올라온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똑같은 가르침을 자기가 배운 만큼만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性과 天道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사철을 통틀어 우매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스승들 중에서 공자만큼 性과 天道에 대해 깊이 있게 자주 알려준 성인도 찾아보기 어렵다. 상달(上達)의 세계는 하학(下學)에 충실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어제 공부에서, 공자가 자공에게 인(仁)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던 장을 공부하면서 내용을 모두 풀이하고, 시평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요즘 정치인들에 대한 행태와 브런치에서 헛된 과욕을 통해 자기 과시 혹은 자기만족을 갖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하는 내용을 담았었다.

그런데 한 독자가 인(仁)을 말하면서 결론이 왜 그렇게 가냐며 의아하다는 반문을 댓글에 툭하고 달았더랬다.


처음엔, 어떤 의도였는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하는 답글을 달아주었으나, 아무래도 그렇게 설명한다고 이해될 것이 아니다 싶어, 얼른 모두 지워버리고, 그저 내가 필력이 부족하여 그런가 보다고 댓글을 고쳐달았다.


일반인들에게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재미있는 광고가 있었다. 당시 그 업체의 대표가 직접 출연한 광고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었다.

“좋은데, 이게 남자한테 참 좋은데,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

그 제품이 어떤 것이고,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 이들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그 광고를 기억했다. 아마도 광고를 기획하고, 직접 출현했던 업체의 대표는 바로 그런 부분을 노렸을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인(仁)에 대해, 문장처럼 그저 말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고, 그것을 모두 쉽게 알아듣는다면 누가 매일같이 어렵게 공부할 것이며, 그렇게 알아듣기 쉽고 설명하기 쉬운 것이라면 누가 그리 어렵게 수행하고 자성하겠는가 ?


나는 그저 단순 무식하여, 공부하면서도 이해가 더딘 아둔한 사람이긴 하지만, 공부를 잘못배워 그것으로 혹세무민 하는 자들이나, 혹여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데 제대로 된 공부를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그나마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도록 곁에서 해설하고 도움을 주려는 아주 낮은 등급의, 아직도 배우는 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수많았던 공자의 제자들, 그것도 명철하다고 이름났던 72 제자들, 그중에서도 상위 10명의 공문십철에 해당하는 이들, 그리고 그 정점에 있었던 자공마저도 한참이 지나서야 이 장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겨우 자신을 모멸하는 느낌이 들 정도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1대 1 질문을 받고 등급을 인정받아 스승 공자에게 性과 天道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며 저리도 기뻐하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공부는 1도 하지 않아 형이하학적인 가르침조차 이해하지 못한 자들에게 형이상학의 것을 말해준다한들, 그들이 그것을 말해주었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며, 계속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만 한다고 오히려 비난까지 퍼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내가 그 뜻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알아듣기 쉽게 풀어 설명해주려 하는 것이고, 자기만 모르면 그나마 피해를 일으키는 폭이 작을 수 있으나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서 잘못된 인식과 언행으로 다른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사회를 좀먹는, 정치를 한다는 이들에 대해 더욱 호된 회초리를 들어 나무라는 것이다.

어제 부러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나무랐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진정 형이상학에 해당하는 인(仁)을 알고자 하고, 행하고자 한다면, 아무런 공부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글을 씁네 작가가 되네 하면서 공부도 하지 않고 자기 사변을 풀어내는 글쓰기가, 다른 이들에게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수양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주고, 그 진의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공부하지 않고, 그나마 가끔 생각날 때마다 책장을 슬쩍 들추고, 대강 그 안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 몇 개로 자신의 사변을 풀며, 글을 씁네 하는 이들에게 아무리 형이상학을 일러주려 하려도 소귀에 경 읽기 일 수밖에 없다. 매일같이 공부하고 수양한다고 했던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나마 그 위에 위의 가르침을 듣고서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어 감탄한 이는 자공뿐이었다.


공자께서 가르침을 설파하시면서도 왜 그리 답답하고 속상하셨는지, 막상 내가 그 비슷한 입장이 되고 보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같이 공부가 한참 부족한 사람도 이럴진대, 공자께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또 어이가 없으셨을까.

그 마음이 전해져 와 마음이 아리고 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 글쓰기를 선택하였고, 지금도 웃돈을 얹어주며 칼럼 한 칸이라도 연재해달라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고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 돈도 안되는 이 고전 읽기를 매일같이,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써나가며 뜻있는 이들과 함께 공부하자고 결정한 것에 후회는 없다.

그저 묵묵히 나는 내가 갈 길을 갈 뿐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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