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중(晏平仲)은 제(齊)나라 대부로 이름은 영(嬰)이라 한다. 어제 자산(子産)의 생애를 언급할 때 춘추시대 중후반기의 현인 정치가로 꼽힌다고 언급했던 것 바로 그 안영(晏嬰) 되시겠다. 자산(子産)과 동시대이니 공자보다 한 세대 위의 선배 격이다.
이제까지 공부하면서 익히 봐왔고 익숙해질 만도 하겠지만, 공자는 칭찬을 남발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칭찬을 남발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지간한 사람들을 허여(인정)하는 일이 아주 드물고 엄청나게 칭찬에 인색한 꼬장꼬장 칼 같은 성격의 스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에 이어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 이렇게 칭찬이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공자가 칭찬을 다 했다는 말인가 하고 자세히 살펴 공부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이 내용은, <명심보감>에서,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놓은 ‘교유편’에도 그대로 원용되는 내용이라 고문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기본 중에 기본으로 언급되곤 하는 구절이다.
먼저, 이 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뭐 살펴보고자시고도 없다. <명심보감>에 실렸을 정도로 아주 짧고 깔끔한 안평중(晏平仲)의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 대해 칭찬한 한 마디이다. 방식은 어제 공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안평중(晏平仲)에 대해 평가를 함과 동시에 <명심보감>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이렇게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투영 방식의 가르침이다.(한번 배우고 나니 이제 그 형식도 훤히 보이지 않는가?)
정자(伊川)가 이 장을 한 마디 문장으로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남과 사귀기를 오래 하면 공경이 쇠해지니, 오래되어도 공경함은 사귀기를 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친해지고 자주 만나고 가까워지면, 공경함을 잃게 된다. 그걸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그리한다. 그것이 본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익숙함이 그렇게 사람을 간사하게 만든다.
일단 말이 편해지고, 말이 편해지면 행동이 편해지고 말과 행동이 편해지면 점점 공경함과 거리로 만들어졌던 예절이 무너져버린다. 그리되면 조금씩 무례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언감생심 꿈에도 꾸지 못했던 언행들이 튀어나와 무례를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게 된다.
친구사이가 그러하고, 선후배 사이가 그러하며, 부부 사이가 그러하고, 그래서는 정말로 안되는데 가장 가깝다고 섬겨야 할 부모님에게 자식이 함부로 구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요즘은 그 정도가 험악하고 막 나가기 시작하여 뉴스에서 그런 상황들을 접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안평중(晏平仲)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러지 않기가, 친한 거리를 유지하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렇게 하려고 의식했던 사람들은 안다. 때문에 공자가 그를 그 한 부분만으로도 허여한 것이다. 사람과의 사귐이 그러하였을진대 그가 다른 일은 대강하고 사람은 허술하였겠는가?
대개, <논어>의 장구 중에서도 간단명료하게 기록된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읽어도 뻔하고 당연하고 그래야만 하는 내용인데 곱씹어 읽어보면 그렇게 실행하는 이들이 없구나! 그래서 夫子가 이렇게 강조한 것이로구나!’
큰 가르침을 얻겠다고 허세를 부리며 마음먹고 머리 밀고 산에 올라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실제로 그런 짓 하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던가, ‘작은 은자는 숲에 숨고, 중간 은자는 저자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에 숨는다’고.
도대체 안평중(晏平仲)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리도 간단한 것 같지만 그 어렵다는 일을 해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안평중(晏平仲)은 후대에 안자(晏子)라는 존칭으로까지 불렸던 현인 중 한 명이었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상대부(上大父)를 지낸 안약(晏弱)의 아들로, 제나라 영공 26년(B.C.556년)에 아버지가 죽자 상대부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조정에서는 군주를 충직하게 보좌했고, 외교 무대에서는 당당하게 원칙과 예의를 지켜 제나라의 위상을 높였다. 이런 능력과 처신 때문에 제후국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탁월한 정치가로 영공, 장공, 경공까지 세 임금을 섬기며 약 40년 동안 제(齊)나라 정치를 주도하고 외교활동을 이끌었다. 그 유명한 『안자춘추』의 주인공 되시겠다.(저자로 착각하고 아는 척 아는 이들이 많은데, 이 책은, 안영(晏嬰)과 관련된 이야기를 묵어 편찬한 그의 언행록이다.)
그의 사귐이 어떠했는지 처음 안평중(晏平仲)에 대해 알게 된 이들은 감이 안 올 수 있으니 그의 사귐을 알 수 있는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해보고자 한다.
안영(晏嬰)은 키가 작고 생김새도 볼품없었으나 그의 총명하고 뛰어난 말솜씨는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고 인재를 존중했으며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재상이 된 후에도 식사 때 고기반찬이 한 가지를 넘지 않았고, 식솔들에게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안영(晏嬰)이 외출을 했는데, 길가에서 죄수로 끌려가는 현자(賢者) 월석보(越石父)를 만났다. 안영(晏嬰)은 그를 불쌍히 여겨 타고 있던 수레의 왼쪽 말을 풀어서 속죄금으로 내주고 집으로 데려와, 그를 두고 혼자 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월석보(越石父)가 안영(晏嬰)에게 절교(絶交)하기를 청했다. 이에 놀란 안영(晏嬰)이 놀라 사과하며 물었다.
“제가 어질지 못한 사람이긴 합니다만, 방금 선생을 재난에서 구해드렸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빨리 절교하자고 청하십니까?”
이에 월석보(越石父)가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에게 자기의 뜻을 보여준다 배웠습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속죄금을 주고 저를 구해주셨을 때, 저를 알아주는 분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를 알아주는 분이 접대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는다면, 차라리 죄수의 몸으로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생각에 다시 절교를 청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안영(晏嬰)은 즉시 예의를 갖추고 그를 귀한 빈객으로서 대우했다. 이처럼 안영(晏嬰)은 신분의 차이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늘 사람을 사귐에 스스로 낮은 자세로 처세했다.
그렇다고 그가 이렇게 겸손하고 굽히기만 한 사람 좋은 호인이었다고 착각할까 싶어 그가 자신보다 더 우위의 인물에게는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어 그것도 소개한다.
안영(晏嬰)이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초(楚)나라 사람들이 그의 몸이 작고 볼품없는 외모만 보고는 그를 무시하며 대문 옆의 개구멍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에 안영(晏嬰)이 이를 거절하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만약 개 나라의 사신이었다면 마땅히 개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나, 나는 초(楚)나라의 사신으로 왔기 때문에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에 그의 접대를 맡았던 관리가 얼른 그를 대문으로 인도했다.
안영(晏嬰)이 초(楚) 영왕(靈王)을 알현하니, 영왕(靈王)이 그의 용모를 살펴보고 역시 깔보며 말했다.
“제(齊)나라에는 훌륭한 인재가 없습니까?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습니까?”
이에 안영(晏嬰)이 대답했다.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는 거리가 3백여 개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소매를 펼치면 태양도 가릴 수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몸에서 흐르는 땀을 합하면 마치 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다 사람들이 한번 남긴 발자국 위로 새로운 발자국이 수없이 생기는데, 어찌 훌륭한 사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제법이다 싶었던지 영왕(靈王)이 그를 대놓고 다시 한번 무시했다.
“그런데 어찌 당신 같은 볼품없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소?”
그러자 안영(晏嬰)은 여유 있게 바로 그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응대했다.
“제(齊)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모두 각 나라의 실정에 맞게 보냅니다. 훌륭한 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훌륭한 인사를 보내고, 그렇지 못한 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는 그만한 인물을 보내는 법이지요. 저는 훌륭하지 못한 편이라서 이번 사신으로 뽑혀 왔습니다.”
그제서야 안영(晏嬰)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깨닫고 무안해진 초(楚) 영왕(靈王)은 그를 정중히 접대하였다.
(그가 복숭아 2개만으로 골칫거리 3명을 한꺼번에 처리한 재미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자신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약자에게 더 낮은 자세로 사귐을 구하고, 자신의 외모를 무시하는 임금이라 할지라도 나라를 대표하는 대신으로서 강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 당당하는 것은 그만한 실력과 내공을 갖춘 수양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능히 보일 수 없는 처세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삼가고 예의를 갖추지만 그 사귐이 오래가면 끝까지 좋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수천 년 전인 당시나 별을 향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안영(晏嬰)은 처음에도 공경하는 마음을 다해 사람과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끝까지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사람과 사귀었기 때문에 마땅히 성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사기>를 통해 550여 년간의 역사를 기록하며 수많은 인물들을 논평했던 사마천이 유독 존경을 표했던 인물이 안영(晏嬰)이었다. 사마천은 관중과 안영을 함께 다루고 있는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안영(晏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만약 지금 안자(晏子)가 살아 있다면 나는 말을 끌며 그를 모시는 마부의 신세가 되어도 좋다. 그만큼 나는 안자를 흠모한다.”
공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의 ‘곡례자하문(曲禮子夏問)’편에서 안영(晏嬰)의 사람됨을 총평하면서 “安平仲可謂能遠害矣.(안영(晏嬰)은 해로움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라는 극찬을 하고 있다.
멀리 친구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신이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했을 부모님께, 그리고 당신의 곁에 있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나는 너무 함부로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밖에 나가서는 사회생활합네, 내 체면이 있으니 함부로 하고 다닐 수가 없네, 하면서 정작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당신의 사랑들에게는 너무 함부로, 가벼이 대하지 않았던가?
존경에 마지않아야 할 부모님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조차 그 공경함을 지키며 사람됨을 다 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친구와의 사귐까지 갈 것이 있을 것이며, 무슨 사회생활을 할 것이며, 그런 정신머리로 감히 어디서 정치를 하겠다고 출사표를 함부로 던진단 말인가?
공경함은 그저 한번 익힌다고 해서 자연스레 몸에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내가 인식하고 삼가고 그러려고 노력해야 겨우 조금, 아주 조금 나오는 것이다. 사귐을 오래하기 위해 관계를 유지하게 위해 공경해야 한다는 비즈니스에 입각한 처세술 책에서 떠드는 헛소리에 현혹되어 착각하지 마라.
사귐이 오래가도 공경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라면 그 어떤 것을 살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 각별히 머리에 가슴에 당신의 양심에 새기고 바로 실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