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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3.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46

악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19


           악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2017년의 힘겨웠던 마지막 날, 유일한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었던 제임스의 집에 크리스마스에 이어 초대를 받았다. 제임스는 박 교수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었던 아픔을 이야기해주며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기로 가족 간에 흉금을 터놓는 사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먼저 자신이 스무 살에 자신이 부모에게 버린 받은 아이였고, 그래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방황했던 일부터, 결혼하고 나이 먹고서도 직업이 없이 아이들이 셋 달린 가장 역할을 하며 죽으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까지 진솔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어렵게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았고, 자기 친형을 찾아, 최근에는 형이 일하는 푸껫 섬에 다녀왔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박 교수도 6월에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을 그들 가족과 공유하게 되었고, 그 집 아이들이 셋이나 되었고, 아직 어렸기에 박 교수의 아이들도 중국어로 재잘거리며 떠들며 잠시나마 행복한 크리스마스와 그 해 마지막 날을 맞을 수 있었다.

외교대와 타이베이 시내가 쭉 내려다보이는 산 언덕 쪽의 아파트에 살던 그의 집에서 연말 파티로 왁자지껄하던 사이 12시가 되었다. 한국에 보신각 타종이 있다면 타이베이는 101 빌딩의 불꽃쇼가 있다. 그것을 보는 명당자리가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 옥상이라며 제임스가 박 교수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의 아이들이 시골의 모르는 집에 방문하여 홈스테이를 하는 듯한 느낌으로 그들은 타이완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할만한 가족을 찾았다.

박 교수는 즐거워하며 소리를 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끝까지 간다. 절대 이대로 무너지거나 도망치지 않겠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고, 박 교수는 학교 측에 1월 20일에 연구실과 사택을 퇴거하겠다고 알렸고, 퇴거하기 이틀 전, 재판이 3월 6일에 예정되었다는 통보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에 스승에게 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 여자 아이에 대해 확인하였다. 그 아이가 타이난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올라가며 타이중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더라. 그 아이는 딸 셋의 둘째인데, 초등학교 때 아마도 이상한 변태 선생의 성폭행까지는 아닌 성추행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더라. 정작 중요한 사건은 타이중에 이사하고 난 후,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아이는 아마도 학교의 브라스밴드의 맨 앞에서 눈에 띄는 진두지휘를 하면서 학교에서도 유명했다고 하더라. 그 고등학교에서 대만대학교에 단 한 명밖에 진학시키지 못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대단한 학교는 아니라더라. 외교대학교의 영문과에 진학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갑자기 1년을 휴학했고, 갑자기 한국어학과로 전과를 지망했다고 하더라.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지난번에 말했던, 그 학교의 교사가 자살한 사건이다. 그 여자아이와 모종의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단다. 그리고 그 여자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죽은 다음에 그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하더라. 당시 학교 관계자들에게 얻은 소식에 의하면, 그 여자 아이가 직접 죽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학교 측에서 일이 확대되어 망신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그저 자살로 마무리지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더 자세한 부분을 알아봐 달라고 다시 부탁을 한 상태이다.


문제는 그 사안에 대해 이슈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타이완 언론은 아마도 그 여자 입법위원이 틀어막을 것이고, 아마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가만 놔두려들지 않을 게다. 어차피 자네도 알다시피 타이완의 언론이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지는 너무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국제 언론기구나 국제적인 기구를 찾아서 연락해보라는 부분을 찾아보고, <시사 저격> 에 연락을 취해뒀으니 지난번 신문 인터뷰와 별개로 그 대표부의 부대표의 녹취를 풀어서 저격하도록 하거라. 더 시간을 끌 수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배정된 재판부의 판사가 아주 고약한 여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여자 판사는 페미니즘이나 여당 소속이 아니라 돈을 주기만 하면 어떤 범죄자라도 면죄부를 주는 판사라고 이미 타이완에서도 저격받아 유명한 여자라고 하더라.


자네의 변호사도 이미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재판이 시작되면 어떻게 전략을 세울지에 대해 변호사를 충분히 괴롭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데, 이제까지 절차적 법률 위반을 한 외교대를 상대로 교육부를 타깃으로 이의신청과 교육부 성평회에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거라.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절차적으로 법적 하자가 있는 경우, 내용은 이미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있으니 그 부분도 참고하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 수입이 없을 텐데, 혹시라도 괜찮다면 자네의 계좌를 알려주면 내가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는 비용을 이쪽에서 보내도록 하마.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고, 자네가 돈이 없는 가난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어이없이 실탄이 떨어지거나 하면 마음도 궁핍해지는 법이니 계좌를 일러주면 좋겠구나. 마음 단단히 먹고 가족들은 어떻게 할지를 빨리 판단을 내리도록 하거라.

 

그렇게 스승의 긴 메일을 확인하고 박 교수는 이제 랴오츠리엔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악녀(惡女)인지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그녀의 연기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생각했다.

일단 이민국에서 검찰에서 찍어준 임시 거류증을 받아 국립대 교수 신분이 아닌 형사 재판을 받기 때문에 법원용으로 연기된 거류증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법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그들은 매번 거류증 발급비용을 청구했다.

가족들의 비자는 정식으로 유지되었지만, 2월 18일인 1년이 되는 날이면 만료가 되기 때문에 박 교수는 타이완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살 집이 필요했고, 직업이 필요했으며, 아군이 필요했다. 어느 하나 만만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박 교수는 당분간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보내고 혼자서 타이완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겨울방학중이니까 아이들 데리고 한국에 들어갔다가 와.”

“당신은요?”

“일단 알바 자리라도 한국어 하는 인재를 필요하는 회사들을 찾아보고 있어. 일단 그렇게 해볼게.”

가족들이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퇴거를 하기로 한 전날, 가족들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 그나마 불편한 모습과 힘겨운 모습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동안 이 거지 같은 나라에서 힘겨웠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족들을 보내러 공항에 다녀온 그날 오후 아주 오랜만에 아이들을 귀여워해 주던 아이들 학교의 교감에게서 보이스톡이 갑자기 왔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예찬이 아버님.”

“네. 교감선생님 잘 지내세요?”

“괜찮으세요?”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박 교수가 뜨끔했다.

“교감선생님도 잘 지내셨죠?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아무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어요.”

“네.”

“그 지난달에 중선 일보에 타이완에서 있던 사건에 대해 난 기사 봤어요.”

“아, 그게...”

박 교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스승의 말대로 자신의 신분이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만한 개인정보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서 교감이 말을 꺼내는 거지 싶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게... 아, 저도 대만에 많이 놀러 다니고 해서 걔네 지저분한 거 잘 알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네. 말씀하세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억울한 일을 당하셨다는 기사였는데, 그 기사의 댓글에 어떤 사람이 예찬이 아버님의 이름을 가운데 자만 빼고 그대로 올린 거예요. 사실 기사에 S대 교수 출신이라고 나왔고, 1년 전에 예찬이네가 아버님이 교환교수로 가시는 거 다 소문이 파다했고 학부모들도 부러워했기 때문에 다들 알거든요. 사실 S대 교수 출신이면서 타이완에 간 교수라니까 다들 알았는지 게다가 예찬이 아버님이 여러 가지 학교 행사에 와서 아이들 도와주셔서 학부모들이 예찬이 아버님에 대해서 다들 알고 부러워했었잖아요.”

“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 아니라서 알려진 게 불편하긴 하지만 제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쓸 것도 없는데 뭐가 문제가 된 건가요? 아이들은 이미 그 학교에서 나왔잖아요.”

“제 생각에는... 아마 얘들이 이제 한국에 들어오죠?”

“아, 네. 일단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겨울방학 중에 생각을 좀 해보려고요.”

“아무래도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S대 교수 출신 아빠가 그렇게까지 아이들한테 신경 써주고 뭐했다고 입이 가벼운 학부모들이 여기저기 그 댓글을 보고 떠들고 다녔나 봐요. 학교에 입빠른 엄마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란 그 기사에 댓글까지 단톡방에 쫙 퍼져서 아무래도 아이들도 다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착한 학부모가 저에게 그 소식을 알려줬어요.”

“네?”

“그래서 아무래도 아이들이 우리 학교로 복귀를 하면 어린 나이에 상처 받을 게 걱정되어서 아무래도 학교로 컴백시키는 것은 보류하시거나 다른 학교 쪽을 알아보시는 게 아이들 정신 건강상도 좋을 것 같아서 어렵게 전화드렸어요.”

“아니. 그게...”

“억울하신 상황이란 저는 기사 보고 감이 다 잡히는데, 이 입빠른 엄마들은 내내 예찬이네 집이랑 사는 거, 부모님 직업, 뭐 그래서 많이 콤플렉스가 있어서 눌려 지냈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그래서 그런 일이...”

“후우. 일단 알겠습니다. 이렇게 미리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 돌아가게 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혹시 제가 뭐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이 저한테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박 교수는 짐을 챙기러 연구실로 뛰어가 컴퓨터를 켜고 지난달 실렸던 중선 일보 기사를 찾았다. 기사에 댓글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류가방에 들어있던 태블릿을 꺼냈다.

“아!”

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휴대폰 인터페이스에 맞춰 모바일용으로 나온 뉴스에는 댓글을 달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 모바일 용에 댓글이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욕설이나 섬 짱개들을 욕하는 다양한 지저분한 댓글 속에서 정말로 비아냥거리듯 마치 현지에 있는 사람처럼 “외교대에서 벌어진 그 사건? 성은 박이요 이름은 OO이더라.”라고 대학교 이름과 박 교수의 이름을 언급한 댓글이 있었다. 이미 한 달이 넘었으니 계속 보지 않는 이상 기사가 올라왔을 그즈음에는 볼 사람들은 다 봤다는 말이 됐다.

지금 댓글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타이완에 있는 사람들이나 외교대 관계자들은 박 교수가 사건의 당사자라는 것을 다 안다. 코딱지만 한 타이완에는 모두 소문을 퍼뜨렸고 그것이 주영희와 여자 입법위원이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건 경우가 달랐다. 한국에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려 생활을 망가뜨리겠다는 아주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짓이었다.

 

어렵게 인터넷 메일을 통해 고소장을 접수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박 교수는 그 댓글을 누가 달았는지 경찰을 통해, 그것도 경찰의 실수를 통해 알게 된다.

산 꼭대기 허접한 사립대에 교수로 와 있는 나이가 50이 훌쩍 넘은 노처녀 독신 김호선이라는 여자 교수였다. 박 교수는 그녀를 단 두 번 봤다. 6월 5일 그 사건이 터지기 직전 외교대에서 있었던 형식적인 한국어 학회에 그녀와 왔을 때와, 그 이전에 다른 세미나에서 한 번 그렇게 두 번이 다였다.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명함케이스와 그녀의 중국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S대 마크가 찍혀 있는 자개 문양의 명함 케이스를 들고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마크가 앞에서 선명하게 보이게 흔들어댔다. 박 교수는 그것이 거슬렸다. 언젠가 S대 출신 여자 교수가 있고, 국문과 출신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전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직접 만났는데도 일면식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대학원까지 공부했다면 그 긴 세월 동안 마주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도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명함 케이스를 흔들어대며 S대를 언급하는 것을 듣고서 그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지방대 출신이었다. 그 지방대를 나와 그 지방대에서 석사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 지방대에 교수 자리를 하고 있던 S대 국문과 출신의 교수가 그녀에게 그나마 먹고살려면 S대의 간판이 필요하다고 매달린 그녀에게 국문과에도 현대문학이나 고전문학과는 달리, 국어학 전공만이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고, 2년 만에 학위를 주는 관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S대에서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2년 만에 그 교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박사학위를 챙겨 S대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이다.

물론, 나중에 그녀에 대해 알아보게 되면서 그 사실을 재확인했지만, 그 정도는 굳이 알아보지 않더라도 알만한 수준이었다. 가장 큰 이유가 그녀가 타이완에 교수로 부임하게 된 배경과 그녀가 타이완에서 타이완 학생들을 가르친 지 3년이 넘었는데, 중국어로 음료수를 제대로 주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외교대의 K대 언어학과 출신의 뚱뚱이 박 교수도 중국어를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나라를 가던 그 나라에서 교수를 하는 한국인 교수들의 레벨은, 현지어로 생활하는데 무리가 없는가, 현지어로 강의가 가능한가, 그 위가 현지어로 논문을 쓰고 발표할 수 있는가로 나눌 수 있었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박 교수가 만났던 것이 한국어학회였음에도 한국어만으로 의사소통하던 그녀와 달리 참가했던 타이완의 다른 교수들과 중국어로 소통하는 박 교수를 보며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던 것을 박 교수가 예의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에 대해서는 논외의 것으로 취급하여 그다지 말을 깊이 있게 섞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둔 것이 아마도 자신을 선배라고 대접해주길 바랬던 그녀의 턱도 없는 바람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자격지심을 건드린 듯했다.

그리고 나중에 듣게 된 추잡한 소문,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그녀가, 유부남인 외교대의 뚱뚱이 박 교수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굉장히 밀접한 사이를 유지하며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런 추잡한 소문을 접하고 그녀의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청결벽이 심한 박 교수에게는 속이 울렁거리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그녀에게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 용납될 것은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그녀가 타이완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한국에 잠시 들르는 정도의 삶의 패턴을 유지하기 때문에 경찰 조사를 위해 들어갈 수 없다며 버티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 실랑이를 하며 스승이 소개해준 <시사 저격>의 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모든 자료를 전달받았고 곧 부대표를 실명으로 저격하는 기사가 나갈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제 반격의 기선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 교수는 알바 겸 한국인이 운영하는 여행 콘텐츠 회사에 방한 칸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이사를 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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