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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4.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47

한국인을 해하는 가장 큰 적은 한국인일지니...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23


         한국인을 해하는 가장 큰 적은     

                        한국인일지니...


사례 1. 전형적인 기레기

 

<시사 저격>의 방 기자는 흥분한 상태였다. 계속 똑같은 질문을 박 교수에게 던졌다.

“이 녹취, 중선 일보 이후에 저희한테만 독점으로 주시는 거 맞죠? 절대 다른 데 주시면 안 됩니다.”

“네. 선생님을 통해서도 그렇게 얘기 들었다면서요. 베테랑이시라고 하시니 이번에 확실하게 대표부의 박 부대표를 저격해주실 수 있는 거, 믿어도 되는 겁니까?”

“하하! 제가 베테랑은 아닙니다만, 글쎄요. 교수님의 억울한 심정을 이해하고 공관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입장으로써 무엇이 옳다 그르다 라고까지 결론지어 말씀드리긴 어렵군요.”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녹취까지 전해드린 겁니다.”

“그런데 아, 이 녹취 들어봤는데요. 정말 대박이더라구요. 저는 처음에 교수님 말씀만 듣고 그냥 오버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녹취 다 들어보니까 아무리 외교부가 쓰레기들이고 싸가지 없고 대한민국 국민 보호를 개판으로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위 재외국민 보호과장까지 지냈다는 인간이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뒤로 쏙 빠져서 이러는 건 아니죠.”

“그래서 언제 보도가 될 예정입니까?”

“일단 지면에 올리는 쪽으로 생각 중입니다만, 시점에 대해서는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준비해서 데스크와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대강 언제쯤 책으로 나올까요? 일간지가 아니니까 아무래도 분량도 많이 다룰 수 있으니까 자세히 다룰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추천을 받은 매체인 건데....”

“내일쯤 예상하고는 있습니다. 한국 외교부 본부와 타이완 외교대학교 측에 공문을 보내 놨는데 최소한 보도윤리상 반박할 기회를 공평하게 줘야 하기 때문에 그 답변이 오는 대로 내보낼 계획입니다.”

“아하. 잘 좀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한국에 도착한 아내와 얘기 끝에 아내가 아무래도 대학 이름도 실명이 아닌 이니셜로 표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여 박 교수는 다시 방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카톡도 연락을 했지만, 한참이 지나 읽음 표시는 되는데 그에게서 답변이 오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을 카페에 올리자 3시간이 되지 않아 스승에게서 확인 글이 도착해 있었다. 박 교수의 모니터를 보며 맥이 탁 풀렸다.

 

- 아무래도 기레기에게 당한 것 같구나. 데스크에서도 연락을 피하길래 다른 루트로 좀 알아봤더니 외교부 쪽에서 공관에 알렸고 대표부 측의 부대표라는 작자가 자신의 사활이 걸린 일이라면서 딜을 했단다. 딜을 요구한 쪽이 외교부가 아니라 그 담당 기자라는 놈이 기사를 내보지 않는 조건으로 딜을 한 것 같다는구나. 결국 그놈의 배만 채워주는 꼴이 되었구나. 나는 그래도 주간지 중에서는 나름 르포기사를 제대로 작성한다고 하여 추천해준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 자네에게 볼 낯이 없구나. 한국에 언론 대개가 기레기라는 말은 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저격 대상에게 딜을 하고 지 배를 채우는 놈이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단 그 처음 타이완에서 기사를 내보냈다는 통신원을 찾아서 반박 보도를 요청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특파원이 한 명도 없는 지역이니 그 <통합 통신>측의 통신원이 후속 취재의 형식으로 기사를 작성하게 되면 아마도 다른 받아쓰기를 했던 언론들도 조금의 움직임은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이다. 어쨌거나 모든 것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사례 2. 언론사를 가장한 <통합 통신>의 후안무치

 

류 통신원에게 연락을 취한 박 교수는 그가 연락도 잘 안 받고 카톡도 한참이 지나서야 받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방 한 칸을 얻어 살게 된 타이완 여행 콘텐츠 회사에서의 눈칫밥은 눈칫밥대로 어려웠다. 나름 출퇴근 규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지하철 5 정거장의 거리를 환승까지 해가며 숙소에서 타이베이역까지 아침 7시에 나가 저녁 7시에 돌아오는 일과를 주말 빼고는 계속했다. 그러던 중에 카톡을 읽었다면 반나절이 지나서야 <통합 통신>의 류 통신원에게 연락이 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취재하고 보내는 원고료로는 생활이 안되어서요.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두 군데 뛰고 있는데요. 주로 저녁시간이라 밤늦게 돌아오고 원고 좀 쓴다고 뭉기적거리다 보면 늘 새벽이라 그때 자면 이렇게 한 낮에야 일어납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긴급하게 이야기하실 게 있다고 적으셨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일단 좀 만납니다. 이렇게 얘기할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저도 주영희를 찾아갈 것도 아니고, 사건이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알고 싶었는데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토바이로 움직이니까 외교대 쪽으로 갈게요.”

“외교대에서는 쫓겨났습니다. 지금 다른 곳에 의탁하고 있어요.”

“네? 국립대에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교수를 내쫓습니까? 그건 타이완 교수법에도...”

“다들 그 소리는 합디다. 일단 만납시다. 타이베이역 쪽에서 주말에 보면 괜찮겠어요?”

“제가 주말에도 강의를 하긴 하는데, 괜찮으시면 아주 늦은 시간도 괜찮으실까요?”

“그럽시다. 그러면 타이베이역 말고,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그렇게 며칠 뒤 야밤에 맥도널드에서 박 교수는 그간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 넘어갈 시간이었음에도 그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류 통신원은 메모하던 수첩을 넘기고 또 넘겨가며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

“물론 류 통신원이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기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가면서 그게 <통합 통신>의 단신 뉴스까지 tv에 탔어요.”

“아, 그거 저도 좀 이상해서 살펴봤는데요. 제가 기사를 쓴 것을 보고 주영희가 데스크 쪽에 직접 연락을 해서 충격적인 기사가 어쩌고 하면서 나팔을 불었답니다.”

“네? 주영희가 그렇게까지요?”

“자기 나름대로는 80년대 타이완 특파원 타이틀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나름 그때 햇병아리 인턴 기자들이 지금 살아남아서 거의 데스크들을 하고 있으니 그 인맥을 동원한 것 같더라구요. 물론 대단하게 말발이 먹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이슈가 이슈니만큼 데스크 쪽에서 뭔가 자극적인 기사로 주목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처리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 죄송하네요.”

“후우. 그래서 아까 얘기를 계속하면, 타이중의 그 여자애 고등학교 교사가 자살한 사건까지 있다고 하는데 가서 취재를 할 의향이 있어요?”

“저도 사실 가서 밀착 취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요. 일단 저도 한국인이라는 신분적인 한계가 있어서 타이중에 가서 확실하게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먹고사는 게 한계가 있어서 제가 정식 기자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 일단 교수님이 이제까지 말씀해주신 것만 하더라도, 몇 가지 가닥을 잡아서 명확한 거짓말이 드러나는 것도 지금 엘리베이터 건부터 제가 계속 미심쩍어하던 부분들이 밝혀진 게 있으니까 억울한 누명이라는 것과 대표부 박 부대표와의 대화 녹취 이메일로 넣어주시면 다시 제가 확인하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는데, 지금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게 류 통신원밖에 없어요. 타이완애들처럼 찌라시가 아니라 정말 보도라는 걸 할 마음이 있다면 제대로 후속보도로 진실을 한국에 알려주세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은 다 해볼게요. 그런데 일단 데스크랑 얘기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송고하는 원고의 게재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이 베이징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통합 통신> 기자거든요.”

“알겠어요. 만약 필요하면 내가 서울 본사에 데스크한테 연락을 취할게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기사의 초고라면서 류 통신원에게서 기사 원고가 왔다. 그 초고를 박 교수에게 보내면서 베이징의 특파원에게 송고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다시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이런 경우도 많은데요. 킬 했다고 조차 연락도 안 주고 그냥 묵묵부답이면 킬인 걸로 알아라 하는 식이예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교수님의 지금 사정도 있고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아까 카톡을 했었는데, 제가 오해 살 것 같아서 그냥 특파원 기자님이 보내준 내용 그대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잠시 뒤 류 통신원에게서 베이징의 <통합 통신> 특파원이라는 자의 대답이 왔다.

 

- 장사 한두 번 해? 그나마 S대 출신 교수에 성희롱 어쩌고 하니까 팔릴 기사라서 한번 탄 거지 그 교수가 억울한지 어떤지 한국에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우리나라도 아니고 동남아 못 사는 나라에서 린치 당한 교수의 이야기를 실어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정의에 넘치는 기사를 집중 취재까지 하는 매체라고 착각하는 거야? 그냥 지난번 요구르트 택시기사 성폭행 사건급으로 한번 터트리고 주목 모았으면 1회성으로 끝나는 거야. 그런 줄 알고 더 귀찮게 하지 마. 자극적인 뉴스 나오면 그런 거나 좀 만들어서 보내.

 

들고 있던 전화기를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박 교수는 다시 <통합 통신>의 서울 본사 해외파트 중국 쪽의 데스크를 물어물어 연결했다.

“여보세요. 누구시라구요?”

그가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타이완에 외교대학교 박 교수라고 합니다. 지난번 한국인 교수 성희롱 사건으로 그쪽에서 보도했던....”

“아아! 네. 어쩐 일이십니까?”

“타이완 언론에 나온 대로 받아쓰기해서 통신원이 해서 보낸 내용을 그대로 실었더군요.”

“네? 뭐 그거야 기소된 게 사실이잖아요?”

“공소장에는 피해자가 7~8명이라는 거짓말도 적시되어 있지 않은데 타이완 언론에 나온 찌라시를 뭣도 모르는 통신원이 보낸 대로 그대로 보도하는 게 소위 나랏돈으로 운영된다는 <통합 통신>이 할 짓입니까?”

“그건 모르겠구요. 어쨌거나 기소된 거잖아요. 정 억울하면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정식 고소를 하던가 재판을 거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기자잖아요. 그러면 당사자가 이렇게 말할 때는 사실관계가 제대로 정리되었는지, 정리되지 않았다면 정정보도나 사과보도 혹은 후속보도를 제대로 취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거 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매체도 아니고. 타이완 애들도 불쌍해요. 자기네 나라에 안 좋은 기사라도 나올라치면 우리 사무실에서 멀리 있지도 않아요. 광화문에 사무실에서 나와서 자기네 중국에 치여서 불쌍한데 웬만하면 자극적이거나 비난하는 기사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얼마나 줄을 대고 그러는데...”

“그래서 그렇게 용돈 좀 받고 대한민국 국민이 외국에서 이런 꼴을 당해도 찌라시 기사 내고 입 싹 닦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찌 되었든 저희는 이제 그 사건에 관심도 없고, 아니, 타이완 자체에 한국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우리 <통합 통신>에서 특파원으로 나간 베이징의 뉴스도 잘 다루지 않는 판에, 교수 일 개인의 문제를 후속 보도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구요. 알겠습니까?”


그 데스크라고 밝혔던 놈은, 3년 반 뒤에 여당이 발의하려고 하는 언론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는 법령에 대해, 마치 양심적인 기자인 것처럼 나서, 언론사들이 자체적으로 잘못된 기사에 대해 검증하고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마련하는 위원회를 발촉 할 테니 제발 그 법령은 악법이니 발의하여 통과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자회견의 기자 무리에 속해 있었다.


사례 3. 친 대만 국회의원이라는 자의 정체

 

박 교수가 다음으로 찾은 것은, 대만 정계와 연결고리가 있는 국회의원이었다. 일전에 외교통상위원장을 맡고 있는 위원실과도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지만, 언론인 출신입네 하면서 몸만 사리고 그저 위원장직에만 만족하는 그에게서 실익을 얻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자료를 좀 찾아보니, 부산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시 공대 출신의 학자 지망이던 자로, 웃통을 벗어젖힌 포스터로 돌풍을 일으키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젊은 날부터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이가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에서도 다들 중국 눈치를 보며 타이완의 차이잉원이 임명될 때 참석하지 않았는데, 자신만이 친 대만 국회의원으로 막역한 사이임을 강조하면서 참석까지 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이력이 넣은 자였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가 야당을 고집하다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슬쩍 빨간 당쪽으로 당적을 옮겨 유일하게 부산에서 야당 국회의원을 하던 절의를 꺾은 철새 기질을 보였다는 것이다.

분석컨대, 계속 야당에 있으면서는 다른 경력이 다양한 의원들 틈에서 더 성장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어차피 여당 기반이던 부산의 특성을 그대로 옮겨, 자신이 이제 십수 년을 국회의원을 했고 터를 다져 당적을 옮겨도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철새임을 감안한 자신의 이력으로 여당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성장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기적이지만 얄팍한 포석을 했음이 읽혔다. 하지만, 박 교수 입장에서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의원실에 연락을 하고 보좌관을 찾았으나 그들은 다시 뺑뺑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국회에 보좌하고 있는 자는 지역구 보좌관에게 연락하라고 했고, 지역구 보좌관은 앞으로 다가올 선거 때문에 표밭을 다지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말을 대놓고 지껄였다.

“의원에게 보고는 한 겁니까? 내가 연락한 지 이미 열흘이 넘었잖아요.”

“아니, 일단 국회 보좌관한테 피드백을 했는데, 의원님에게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왜 국회 보좌관은 연락이 안옵니까?”

“그건 제가 모르죠. 조금 기다려보시죠.”

그렇게 일주일간을 핑퐁 하듯 박 교수를 가지고 놀 듯 그 두 사람의 보좌관은 그 철새 국회의원의 행각과 똑같이 귀찮은 민원을 떨궈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카페에 스승의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정보 수집하던 중에 들은 것인데, 내일 그러니까 1월 29일에 방송국에 현직 여자 검사가 출연해서 미투(Me too) 인터뷰를 한단다. 대한민국이 난리가 날 거다. 아무래도 자네의 사건에는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이제 매카시 열풍처럼 미투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나올 테고 한동안 시끌벅적할 듯하다.

사태를 지켜봐야 하긴 하겠지만, 3월 초에 있을 재판을 준비하고, 타이완 쪽에서 국제기구나 인권단체나 변호사 단체의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는지 한번 모색해보도록 하거라.

 

전부터 스승이 말해왔던 인권단체라는 말이 그제야 박 교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앰네스티.

검색을 해봤다. 있었다. 박 교수는 바로 수화기를 들어 그쪽에 연락을 취했다.

“여보세요. 타이완 앰네스티입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외교대학교 박 교수라고 합니다만, 이곳이 타이완 앰네스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죄송한데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담당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다름이 아니고, 작년 여름에 외교대에서 있었던 한국인 교수 성희롱 사건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아. 들어봤어요. 뉴스도 못 것 같네요. 그 여자 입법위원 누구더라...”

“네. 맞습니다. 그 사건의 당사자입니다만, 타이완 여학생의 무고로 억울한 누명을 썼는데요. 증거도 확보하고 있습니다. 녹취도 있고, 문건 증거도 있구요. 도움을 좀 받을 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막았다.

“우리는 한국인을 위한 인권보호 단체가 아닙니다.”

“네?”

혹시 그녀의 중국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싶어 박 교수가 다시 물었다.

“앰네스티는 국제 인권단체 아닌가요?”

“맞는데요. 한국인의 인권을 보호하거나 대변하지 않습니다.”

“런던에 본사가 있는 그 앰네스티 아닌가요?”

“사실 우리 단체는 이름은 그렇지만 런던과 아무 상관이 없고, 그쪽에서 인가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우리도 이런 단체 이름으로 활동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고, 우리는 억울한 인권침해를 당한 ‘타이완인’만 도움을 줍니다.”

“그런 말이...”

“끊습니다.”

  뚜뚜뚜...

 

박 교수는 장문의 탄원서를 작성하여 홈페이지에 나온 주소로 보내고 다시 연락을 걸었다. 아마도 박 교수의 핸드폰 번호가 뜨는 것인지, 이름만 걸어놓고 활동을 안 하는 것인지 사무실의 전화가 연결되지 못했다.

가족과 떨어져 설날을 맞게 된 박 교수는 긴 설 연휴 전날, 요로결석으로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응급실에 실려가서 고통의 눈물을 삼키며 설날을 보냈다.

그렇게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박 교수의 첫 재판일은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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