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미생고(微生高)가 정직하다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초를 빌리려 하자, 그의 이웃집에서 벌어다가 주는구나!”
이 장에는 그 유명한 옛날이야기의 微生高(미생고)가 등장한다. 그는 노나라 사람으로 성이 微生(미생)이었고, 이름이 高(고)라 하였다. ‘그 유명한’이라고 한 것은 고지식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고사 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본래 《장자(莊子)》 〈도척편(盜跖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생고(尾生高)와 동일인물이다.
그는 한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자가 오기 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물이 불어나 위험해졌음에도, 만나기로 한 그 장소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그 다리 기둥을 안고 죽었다. 《장자(莊子)》 〈도척편(盜跖篇)〉에는,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도척의 입을 빌어 미생의 융통성 없고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제사에 쓰려고 찢어발긴 개나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다를 바 없다. 쓸데없는 명분에 빠져 소중한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그런 미생고(微生高)에 대해 공자가 평가를 내리며, 그는 결코 신의(정직)가 있는 인물의 대명사로도 불릴 수 없다는 일화를 전해준다. 주자가 이 장에 대해 해설한 부분을 통해 무슨 의미에서 그 이야기를 끌고 온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어떤 사람이 빌리러 왔을 때 자기 집에 식초가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빌어다 준 것이다. 夫子께서 이를 말씀하신 것은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생색을 냈으니, 정직함이 될 수 없다고 기롱하신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조금 생소할만한 마지막에 쓴 ‘기롱’이라는 단어는 공자식의 비틀어 후려치기를 세련되게 표현한 말이다.
식초를 빌리러 온 이웃에게 없다고 하지 않고, 부러 또 다른 집에 뛰어가서 그것을 빌려다가 준 것에 대해,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생색을 내다’라는 표현을 통해 공자의 생각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방점,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정직함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없는 물건 하나 빌려다 준 것을 가지고 공자가 그렇게까지 신랄한 비판을 한 것일까?’라고 의문을 가질 이들이 있을 법하다.
당시 중국에서 ‘식초’라는 물건은 음식을 하는 데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발효식품이었더 관계로 귀한 조미료에 속했다. 그러니 이 장을 현대식으로 풀어 해석한 수많은 오독자들의 설명처럼, 우리에게 간장이나 된장 같은 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왜냐구?
만약 어느 집에나 흔하게 있는 빌려줄 수 있는 물건이라면 공자가 미생고를 저렇게까지 욕할 명분이 희석되기 때문이다. 무슨 의미인지 천천히 살펴보자. 식초가 있느냐는 이웃의 질문은 식초가 없었던 미생고에게는 참 무거운 질문일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순간, 자신의 가난이, 혹은 그것을 갖추고 살지 못하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 미생고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빌려서라도 가져다 줌으로써 얻는 심리적인 만족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결국 빌려서 식초를 가져다준다. ‘아, 이 사람은 내가 급해서 달려와 찾는 귀한 물건을 이렇게 선하게 내어주는구나’라는 상대의 평가와 그가 주변에 뿌리게 될 사회적 평가를 덤으로 얻게 된다.
즉, 미생고의 작고 평범한 행위는 결코 선의나 정직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궁핍함을 내보임으로써 받게 되는 자격지심을 미연에 제거하고, 자신이 상대를 도와줄 수 있는 심리적 우월감을 줌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가(명성)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공자는 그 얄팍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그것에 대해 후하게 평가하여 또 다른 미생고가 나올 것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그렇게 가식적인 행위를 통해 만족감을 얻었던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러한 공자의 가르침이 주는 정곡을 이해한 정자(伊川)가 이 장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미생고(微生高)의 정직하지 못함은 비록 작으나 정직함을 해침은 크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 행동이 결국 정직함이라는 용어와 사회적 기준 자체를 오도(誤導)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범씨(范祖禹)는 이 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있으면 있다고 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정직이다. 성인께서는 한 개를 주고받는 것에서 사람을 관찰하여 千駟(千乘의 兵車)과 萬鐘을 따라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단정하신 것이니, 사람에게 작은 것이라 하여 삼가지 않아서는 안됨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주석에서 ‘千駟’이란, ‘말 4천 마리로 수레 1천乘’을 가리키며, ‘萬鐘’은 《맹자(孟子)》 〈공손추하〉 10장의 주석에, “萬鐘은 녹봉의 수이다. 鍾은 量의 이름이니 6斛 4斗가 들어간다.”라는 의미인데 굉장히 크고 많은 규모와 범위를 말한 것이다.
즉, 식초 빌려주는 것 같은 작은 예를 들기는 하였지만, 그 작은 일 하나만 보더라도 그의 인성을 알 수 있기에, 작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마음가짐을 바로 하지 않으면 더 큰일을 접하였을 때, 그 본성이 그대로 나와 정직함을 해치고 자기기만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수천 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주변에도 그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다.
실제로는 자신이 가진 돈이 하나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그 돈으로 기부를 한답시며 기부 천사라는 사회적 명성을 얻어 그것을 다시 사기의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간 큰 사기꾼의 이야기에서부터, 사회적 기업을 한답시고 사회적 기업의 탈을 쓰고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해가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연말에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장 싸구려 쌀 몇 포대 가져다 놓고 사진을 박아 홈페이지와 지역신문에 도배를 하는 일은 이제 한 두건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려 뉴스에조차 다뤄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인가?
SNS가 젊은이들을 통해 확산되어 사회적 명함이 되고부터는 그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실제의 삶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젠 명함도 필요 없다. 자신을 대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인스타그램이고, 페이스북이다. 정작 집에 들어가 오래된 라면을 끓여먹더라도 어디선가 캡춰해온 비싼 레스토랑의 사진이 필요하고, 다른 기업 파티에 차려입고 가서 셀레브들과 사진을 찍어서는 다 내 친구들이고 막역한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 범죄와 과장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자도 아닌, 남자가 늘씬 쭉쭉 빵빵한 한국계 미국 여군이라는 가장을 하고 헛바람이 든 한국 남자들을 노려 그들의 재산을 탕진하고 돈을 챙긴 이야기는 이제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다들 코웃음을 치며 듣는 이야기가 되었다.
당신은? 이 글을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있는 당신은 다른가?
어디 가서 뭘 먹으려고 시킨 순간, 절대 포크를 먼저 들지 않고 사진을 찍어대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고르고, 없는 돈 쥐어짜서 간 배낭여행에 당신이 묵고 있는 한참 떨어지는 비즈니스호텔과 다른 비싸고 좋은 호텔에 굳이 들어가서 그곳에서 묵은 듯 사진을 찍어 버젓이 올리고 호텔의 설명을 홈페이지를 뒤져서라도 달아댔던 당신은 이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없는데 있는 척 하면서라도 없는 이들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법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없는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으니 서로 만족을 얻었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반문 말이다.
아니다. 그따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저 자기만족만을 위해 기부천사를 가장하는 이는 없다. 자기가 유통기한 지난 라면을 먹으면서 멀쩡한 라면박스를 사서 기부를 하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그의 행위는 그 기부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창조하기 위한 기만적인 목적을 위한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지, 그저 심리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닐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혹 그가 빚까지 내가며 기부천사를 해서 심리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 빚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가족이나 친지는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구체적인 피해를 입히는 행위가 아니더라도 심리적인 만족도 마찬가지이다. 왕따를 당하는 친구에게 손을 내밀며 선선히 그의 친구가 되어주려는 마음이,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것인지, 나보다 못한 이를 돕는다는 것에서 오는 묘한 희열과 자신도 알지 못한 내면의 만족감을 위한 것인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은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앞서 우리가 공부한 내용에서 기욕(嗜慾; 뭔가 얻고자 하여 의도를 갖고 하는)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어, 혹은 상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내가 일을 찾아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본능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 욕구를 단순히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정직함이나 성실함이라고 칭찬하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고 기준이다. 진정한 기부를 하는 이들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자기 과시나 만족을 위해 기부를 하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 반성을 하게 한다. 물론 사회적 기부가 중요하기에 ‘아너 소사이어티’라는 것도 생긴 것이고 그것은 별개의 사회적 효과와 관련된 이야기이니 본 주제를 흐리는 데 사용하지 말자.
당신이 생활 속에서 아무렇지 않다고 한여름 땡볕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분들에게 음료를 건네는 마음처럼,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에 나이 드신 내 부모님이 생각나서 그리 하는 것이 내 만족을 위함이거나 어떤 사심을 가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그런 내 마음을 표시한다는 것이 칭찬을 받고 평가(명성)를 가져다주면서 마음이 흔들려 주객이 전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자신을 기만하지 않도록 늘 경계하고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 장의 핵심인 것이다.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며 남을 돕는 것은, 정작 남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쌍한 나를 어떻게든 있어 보이게 하여 그 알량한 자존심을 세워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무턱대고 비난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함이 아니고 더 나아가 정직함을 오염시키고 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당신의 인성 수양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순간이라도 가벼이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