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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08.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51

어떤 픽션도 현실보다 잔혹할 수는 없다. 1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37


  어떤 픽션도 현실보다 잔혹할 수는 없다.

                     2018년 3월 15일 주타이베이 대표부

 

굳이 박 교수의 원래 목적이라고 한다면, 당장 급한 라인 대화의 번역 공증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공증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여자 행정직원의 마중에 박 교수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표나 부대표와의 면담이 가능하냐고 훅 하고 들어가 요청을 던졌다. 기실 가장 최초에 부대표와 함께 면담에 동석했던 여자 행정직원은 이미 자신이 한 실수나, 부대표가 한 실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교수에게는 깍듯하고 예의 바른 모습을 보였다. 굳이 설명하자면 대표부의 다른 외교부 공무원들과 달리 교수에게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녀가 잠시 미팅룸으로 들어오라고 안내를 해주었고, 어정쩡한 상태로 혹여 면담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미팅룸에 생수통과 함께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고 왠 젊은 남자와 중국인처럼 생긴 덩치가 큰 여자가 함께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고, 남자는 나이가 상당히 젊은 편이었는데, 자신이 스마트하다는 식으로 여자에게 명령조의 분위기로 이끌어 나가며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며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 적힌 직함을 보며 교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행정원은 들어봤었는데 연구원은 처음이네요.”


그의 그런 반응과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남자가 말을 끊듯이 물었다.


“어떤 이유로, 면담을 요청하신 거죠?”


그의 신경질적이고 의도적인 사무적 어투가 교수의 날카로움의 끝을 살짝 스치며 피가 살짝 배어 나오는 느낌의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아! 목소리 들으니 알겠네요. 그전에 내가 영사 찾는 전화했을 때 나랑 한 번 안 좋게 언성까지 높여가며 통화했던 사람 맞죠?”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바로 교수가 물었다.


“그전에 따님 여권 연장하실 때도 제가 이효정 대리 자리 옆에 있었거든요.”


‘어떻게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식의 밀리지 않겠다는 남자의 대꾸가 이어졌다. 대꾸 없이 가볍게 그를 계속 응시하자, 그는 교수가 아까 말한 질문의 대답을 요구한다고 느꼈는지 다시 대답했다.


“그때 통화는 한번 했었습니다.”

“강준성 씨가 내 변호사에게 1월에 전화하고 이메일로 연락했던 거 기억해요?”


교수에게 안 좋은 기억이 났다. 누군가 중국어를 하는 직원, 그러니까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애가 변호사에게 ‘당신이 한국의 외교부에서 왜 당신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했냐?’는 식의 협박상 이 메일을 보냈던 것이 기억나서였다.


“네. 제가 했었습니다.”

“아닙니다. 됐어요. 그냥 오늘 할 얘기 하죠.”


박 교수는 생각했다. ‘굳이 오늘의 실리를 얻지도 못할 거면서 이런 피라미랑 싸우거나 감정대립을 해봐야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라고.


“본부 하고 통화를 했어요. 재외국민 보호과의 국장, 과장, 거쳐서 결국 경감이라는 사람이랑요. 지난 7일에 내가 메일을 보냈잖아요. 그래서 이번 법원의 공증 문제를 부탁을 하고 12월부터 강준성씨는 나랑 통화를 했었기 때문에 알 것 같은데...”

“네.”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옆에서 뭔가 쓸데없는 대화 메모를 끄적이던 여직원을 의식하는지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자존심의 다짐이 보이는 듯했다. 교수가 천천히 포문을 열었다.


“내가 양수창 대표와 계속 면담을 요청한다고 했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었던 것은 인정하시나요?”

“그런 내용에 대한 부분은 저희는 영사과라가지고...”


외교부의 매뉴얼대로, 1차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 박 교수가 이미 많이 경험해봐서 당해본 사람이라면 숙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방어법이 시연됐다.


“이메일을 받았잖아요? 받았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네네.”


금세 습관이 밴 대답이 나와 버렸다. 늘 나이 어린 영사나 거들먹거리며 상관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대사나 부대사에게 굽신거리며 보고하던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연구원 명함을 내밀었던 젊은 남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으며 다시 전의를 다졌다.


“내가 이 건으로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한다고 작년 12월 전부터 계속해서 연락을 취했잖아요!”


교수가 똑같은 사항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재확인에 들어갔다. 방금 전의 전의와는 상관없이 이런 어투로 묻는 사람들에게는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대답이 다시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네네.”

“그런데 아무런 회답이 없었어요. 그죠?”


반사적으로 굽신거리는 대답을 해버린 자신을 원망하며 다시 정신을 차리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얼굴로 남자가 최대한 딱딱하고 사무적인 어투를 모사했다.


“저희가 오늘, 저 회신해드리지 않았나요?”


하지만 그의 다짐이 어떤 것과는 상관없이 교수는 이미 이런 류의 외교부 미꾸라지 고수급들과도 난전을 펴온 사람이었다.


“오늘은 고사하고 12월 전부터 메일을 보낼 때마다 메일의 끝머리에,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합니다.’라고 썼잖아요?”

“네네.”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교수의 사실 공세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7일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한 번도 답변이 없었단 말이에요.”

“으음...”

“서로 기록이 남는 이메일로 주고받았으니까 답장이랑 내용 보면 다 알 거 아니에요?”

자기주장이나 하소연을 하는 거라면 쉽게 걷어차 버릴 수 있는데, 있었던 사실 위주의 팩트 체크 공격은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를 제외하고는 튕겨낼 수 있는 비법은 외교부 매뉴얼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네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네.”

“그랬더니 한국의 외교부 본부에서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 말을 하던데...”

“그럼 지금 어떤 걸 원하시는 거죠?”


이 타이밍에 끊지 않으면 안 된다. 공관 매뉴얼과 위의 지시는 절대 교수가 외교부 본부와의 연락을 하고 본부가 문제가 되는 사항을 알아버려 윗분들이 곤란해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 터였다.


“첫 번째는 7일에 메일을 보냈는데 아까 문자라고 왔는데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문자로 보내는 게 다운로드가 안 되어서 메일을 계속 보내는 거구요.”

“으음.”


묵직한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생각할 시간을 버는 법은 부대사의 습관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어제 한국의 외교부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대학에서 내 이 메일 아이디를 폐쇄해버렸어요.”

“아, 어제부터요?”

“이틀 전부터요.”

“아!”

“이 얘기도 처음 들어요?”

“아, 저는 출장을 다녀와서요.”


어이없는 대답에 교수의 눈썹 한쪽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남자도 교수의 불편한 심기를 잘못 건드리는 어설픈 대답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긴 했지만 이미 말은 내뱉은 후였다.


“전달을 못 받았어요?”

“아니, 그게 저, 받긴 받았죠. 이메일이 폐쇄되었다 하더군요.”

“강준성 씨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을 때 내용이 다운로드가 안 되어서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계속 요청했던 거, 기억해요?”

“그러면 지금 혹시 다른 이메일 주소는 없으신가요?”


궁지에 몰렸을 때는 다른 사실 확인 질문으로 말문을 돌리라는 매뉴얼대로 시도는 했다.


“아니, 이메일에도 썼잖아요. 유선으로 연락 달라고.”

“아니, 새로운 이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거기로 보내 드릴게요, 저희가.”

“아니! 이메일에 썼잖아요. 메일이 곧 폐쇄되니까 유선으로 연락 달라고!”


무섭게 몰아치며 언성이 약간 높아지자, 다시 늘 혼내던 부대표에게 하던 버릇대로 순순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네.”

“아니, 유선연락을 못하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유선으로 해드릴 수도 있죠. 그런데 아무래도...”


딱히 뭐라고 둘러댈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그러면, 유선으로 먼저 연락을 해서, ‘지금처럼 메일이 폐쇄되셨다고 해서 유선 부탁하셔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이메일 주소 새로 알려주시면 이메일로도 필요한 사항들 정리해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명확하게 모범답안까지 들이미는 사람에 대해서는 딱히 대처하기 어렵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대사나 부대사와는 전혀 다른, 경험해보지 못한 논리적 공격 방식. 그래도 정신줄을 놓치고 끌려다니면 옆에 데리다 앉힌 신입 행정직원에게 면이 서지 않는다.


“저희가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러면 저희에게 먼저 연락을 주실 수도 있으시잖아요?”


말해놓고서도 참 궁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메일로 연락해서 가급적이면 유선 연락 달라고 연락을 한 거잖아요!”

“네.”

“내가 연락을 먼저 취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메일에 유선으로 연락 달라고 분! 명! 히! 요청을 했잖아요. 내가 지금 왜 흥분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언성이 높아지면서 탁자를 탕 치면서 강조점을 딱딱 찍으며 지적하자 남자가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교수의 말을 저지했다.


“선생님. 흥분을 좀 가라 앉히셔야 될 것 같은데요.”

“내가 12월 전부터 이미 이메일에 몇 번이나 지속적으로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한다고 적었잖아요. 나 재외국민, 맞잖아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외교부에, 외국에서 억울하게 누명 쓰고 형사재판까지 진행 중인데, 해당 지역의 재외공관장과의 면담을 요청해도 아무런 연락도 없이 씹거나 심지어는 강준성 씨가 재외공관 명의로 내 변호사에게 보낸 협박메일에 내 변호사가 어이가 없다면서 받은 메일 그대로 나에게 포워딩을 해줬어요. 내용을 봤어요. 사안을 해결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내 변호사에게 대고 거의 반 협박을 했더라구요?”


부대표의 명령으로 영사의 확인을 받아 중국어로 자신이 보냈던 메일 내용이 바로 교수에게 공유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협박이라는 것을 인정해서는 더더욱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저희는 그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겁니다.”

“지금 본인이 말하고 있는 그 사실관계라는 것이 혹시, ‘변호사께서 의뢰인에게 최근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대해서는 왜 너희 나라 외교부가 도와주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라고는 말을 하신 것이 확실합니까?’였나요?”

“그거는 박 선생님이 저희에게 이메일을 보내셨던 내용에 대해서 그대로 물어본 겁니다. 그게 맞는지... 확인한 겁니다.”

“내가 전공이 언어인 것은 압니까?”

“아니요. 잘 모르는데요.”

“몰랐다면 다시 확인시켜 줄게요. 네. 저는 언어학자입니다. 제가 대표부에 보낸 이메일하고 강준성 씨가 보낸 메일이 둘 다 서로에게 증거로 그대로 있어요. 본인도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말은 안 할 거예요. 지금 내가 보냈다는 내용과 본인이 확인했다는 사실의 내용이 전혀 달라요.”

“어떤 게 다르다고 하시는 거죠?”

“혹시 그러면 두 이 메일을 모두 가져와 보실래요? 내가 직접 지적하면서 가르쳐 드릴 테니까?”


여기서 증거물을 가지고 오게 되면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일을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로 온 여직원 앞에서 까발려지는 꼴이 되고 만다. 그것은 거부해야만 한다고 남자의 본능이 방어적으로 질문을 틀었다.


“그러면 저희 대표부를 오늘 방문하신 용건이 어떤 것이죠?”

“다섯 가지예요.


움찔하고 시간을 좀 벌 수도 있었을 텐데, 교수는 전혀 미동도 없이 바로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을 건넸다.


“다섯 가지요?

“네. 첫 번째는 이건 데요. 3월 6일에 1차 공판이 시작되었고 3월 7일에 바로 메일을 보냈어요. ‘판사가 이런저런 이유로 여학생과의 라인 대화 내용을 번역해서 냈더니 한국어 공증을 받아오라고 하니 도움을 요청한다.’라고. 그런데 오늘이 15일인데 어제 14일이 될 때까지 일주일 동안 아무런 답변이 없었어요. 긴급한 사항이라고까지 그렇게 적었는데 말이죠.”

“네네.”

“내가 외교부 본부에 연락을 했더니, ‘그건 뭔가 문제가 있다. 우리 측에서 연락을 취하겠다.’ 라고 하더니 절대 유선연락 말고 이메일로만 소통하겠다고 공표했던 영사에게 연락이 되었다면서 어제사 연락이 온 거예요. 본부에서.”

“어디요?”

“한국에 있는 외교부 본부요.”

“예.”

“재외영사과에서. 거기서 하는 말이 박아현 영사와 통화를 했는데 문건이 따로 되어 있지 않고 같이 되어 있어서...어쩌고 하면서...”

“그러니까 첫 번째는 공증 문의신 거죠?”


말을 끊고 사무적인 내용으로 정리한다. 자신이 공격의 흐름을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해서 매뉴얼대로 남자가 교수의 말을 끊었다.


“네.”

“그 공증 문의는 저희가 아니라 밖에 가셔서 효정 씨한테 하시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죠?”


의아한 듯 묻는 교수의 얼굴을 보면서 흐름을 자신에게 가져왔고, 이제 평상시에 일반인들을 억누르듯 절차와 업무 분장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로 교수를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일단 내가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외교부 공무원의 업무 방식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공증 문제잖아요. 공관도 담당하는 부서가 다 달라요. 그래 가지고 공증에 대해서 문의하시는 거면 공증 담당은 밖에 창구를 통해서 직접 문의하시면 될 것 같아요.”

“공증에 대한 문의가 아니라! 7일에 보낸 이메일을 봤다면서요?”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남자의 같잖은 꼼수가 빤히 보인 것도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실제로 정확하게 말귀를 알아듣고 있지 못했다.


“네.”

“그런 요청 이메일을 보냈으면...”

“네.”

“답이 와야 하는데 답변이 일주일이 넘도록 오지 않아서 재판 기일은 막상 곧 다가오는데...”

“그러니까 첫 번째 질문은 공증에 관한 거잖아요.”

“공증에 대한 단순 업무가 아니구요. 이메일에 대한 내용도 영사과가 아니라 여기 대표부 대표 메일로 보냈어요.”

“네.”

“그러면 여기서 받은 사람이 알아서 업무분장을 해야지, 나보고 일일이 영사과에 찾아가지 않았다고 그래서 연락을 주지 않고 씹었다는 거예요?”


다시 그의 논리적인 공격에 남자의 공격력이 급감했다.


“아니, 업무는 나눠져 있어요. 밖에서 효정 씨가 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거예요.”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업무분장이나 전문적인 부분에 대해 얘기하면서 잘못은 당신에게 있다고 하면 대개는 그쪽이 수세적인 형세가 되는데 예상한 대로 흐름이 흘러가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코너에 몰리는 것에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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