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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0. 2021

대만에 사는 악녀 - 53

어떤 픽션도 현실보다 잔혹할 수는 없다. 3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47



“그러면 내가 이메일을 보낸 대상이 박 준기 부대표인데 이메일을 수신하고 내용을 파악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하는지 업무지시를 하는 게 맞는 거죠?”

“네.”

“그런데 답변이 8일이 지나도록 안 왔어요. 안 와서 내가 한국 외교부 본부에 항의를 했더니...”

“네.”

“‘원문 문건과 번역된 문건이 따로 되어 있어야 하는데 붙어 있어서 문제랍니다.’라는 말을 박아현 영사가 했다는 거예요.”

“네.”

“그래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네.”

“‘면허증 공증도 한쪽에 한국어 원본 면허증 놓고 다른 한쪽에 번역한 것을 둬서 알아보고 쉽게 하지 않냐?’라고 하면서, ‘도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고 했더니 이 사람이 대답을 못해요. 자기도 이해가 안 간대요.”

“네.”

“그래서 박아현 영사가 직접 교수님께 유선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말해두겠습니다.라고 한 게 어제 본부와의 통화 내용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나는 유선 연락을 못 받았구요.”

“네.”

“그래서 오늘 직접 찾아왔어요. 그 와중에 아침에 열리지 않는 파일 첨부해서 또 문자를 보냈길래 그것도 확인하려고 온 거구요.”

“예.”

“그게 다섯 가지 용건 중에 첫 번째예요.”

“네. 공증 관련한 거는 밖에 나가서 물어보세요.”

“그러면 오늘 문자에 첨부한 파일은 뭔가요? 그거 강준성씨가 보낸 거 아니에요?”

이제 고용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는 여자 직원을 보며 남자가 곤란한 듯 물었다.

“오늘 보낸 파일, 효정씨가 쓴 건가요?”

“네네.”

“그거 효정씨가 쓰신 거거든요.”

“오늘 강준성씨 만나러 들어오기 전에 내가 효정씨에게 물어봤다고...”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해서 책잡히기가 싫었는지 그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사건 관련해서 아냐고 물어보신 거잖아요.”

“아니 이봐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그래서 두 번째 용건은 뭐죠?”


얼른 말을 자르고 자신의 페이스로 다시 돌려놓는다는 각오로 마음을 다잡은 남자였다.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에 대한 게 오늘 답변에 없다는 거네요?”


남자의 생각처럼 교수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는 것이 없었다, 단 한 가지도.


“그건 제가 나중에 전달해 드릴게요.”

“누구한테요?”

“대사님 비서요.”

“그러면 여태 보고가 안 되었다는 뜻인가요?”


핵심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3초간의 침묵.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대답한다.


“저희는 항상 보고를 드리죠.”


하지만 교수는 공격력이 그렇게 무딘 자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면 보고를 했는데 계속해서 무시를 하고 있는 거라고 이해해야 맞는 건가요?”

“그렇지 않지요. 저희는 항상 회신해드렸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강준성 씨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틀어서, ‘대표님과의 면담’이라는 주어로 시작되는 문장이 한 구절이라도 있었어요?”

‘아! 도저히 단 한마디를, 지는 법이 없구나.’


남자가 아랫입술을 지긋이 티 나지 않게 물었다. 딱히 대답이 생각하지 않았다.


“강준성씨가 메일을 쓴 사람이니까 나한테 제대로 대답해볼래요?”

“글쎄요. 그거는...”

“없었어요. 그러면 계속 무시된 거 맞아요?”

“제가 전달은 해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민원인의 힘을 빼고 지치게 만드는 것도 대사나 영사를 보면서 어깨너머 요긴하게 배운 방법 중 하나였다.


“미래형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사실관계 확인하는 거예요.”

“보고는 매번 했다고 하는데, 본인이 이제까지 나한테 이메일 답변한 내용 중에 내가 요청했던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에 대한 언급이나 답변이 단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습니까? 사실관계 확인차 묻는 겁니다. 업무 담! 당! 자!한테”


유독 ‘담당자’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게 총알 한 발 한 발처럼 남자의 가슴에 박혔다.


“으음... 그 부분은 제가... 이메일이 저희에게 문의하신 내용이 많이 있잖아요.”

“많고 적고를 차치하고 그건 업무분장 좋아하는 강준성 씨의 업무니까... 강준성 씨가 대답하면 돼요. 내가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을 이 건으로 요구한다고 4차례 이상 공식적인 이메일에 보냈어요. 단 한 번이라도 강준성 씨가 제대로 된 답변을 쓴 기억이 있습니까? 지금 나한테 강준성 씨가 그랬어요. ‘저희는 항상 회신을 해드렸습니다.’라고! 그 회신이라는 거에 내 요청에 대한 답변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어요.”

“이렇게 소리치시면 저희 계속 면담 못합니다.”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경우에는 자해공갈을 마지막 수단으로라도 써서 이 질문과 공격의 늪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자가 외쳤다.


“내가 언제 소리를 쳤어요?”


뜬금없다는 듯이 교수가 다그쳤다.


“지금 저한테 소리치셨어요?”

“내가 소리를 쳤는지 나중에 녹취를 확인합시다.”

“그걸 저희가 왜 확인을 합니까?”

“소리치지 않았는데 소리쳤다고 핑계 대고 도망갈 생각뿐이니까 사실관계를 그것까지 확실하게 확인하자구요.”

“방금 소리치셨잖아요.”


거의 울상이 되어 남자가 항의하듯 징징댔다. ‘녹취’ 맞다. 이 교수는 언제나 모든 통화와 대화를 녹취해서 거짓말을 할 여지를 봉쇄하는 외교부의 천적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그래서 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 자체를 피해야 해. 그래서 나도 연락은 무조건 이메일로만 하고 전화나 면담은 안 하겠다고 원천 봉쇄한 거잖아. 호호호’라고 험담하던 이대 출신 여자 영사의 면상이 떠올랐다.


“양 대표와의 면담 요청에 대한 이메일 요청에 대해 4차례 이상이나 공식 요구를 했음에도 답변이 없었던 것은 강준성 씨의 개인적인 업무실수입니까? 대표의 의도적인 무시입니까?”


딴생각할 겨를도 없이 교수의 치밀한 질문 공격은 계속되었다.


“저희는 매번 회신해드렸습니다.”

“동문서답하지 마시고... 강준성 씨가 작성한 회신 내용에 내가 물었던 대표와의 면담에 대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이라도 나옵니까?”

“저희는 메일 회신해드렸었습니다.”

“메일에 이 내용이 언급된 부분이 있습니까?”

“후우!”

“곤란해요?”

“그전에 사건 관련해서 문의하셨던 내용에 대해서는...”

“아니,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 콕 짚어서 구체적으로 몇 번을 묻고 있잖아요. 양 대표와의 면담 요청에 대한 답변 내용이 한 구절이라도 회신내용에 담겨 있습니까?”

“저희는 항상 메일 회신해드렸었습니다.”

“아니, 왜 자꾸 회피를 해요? 그런 나쁜 것부터 외교부 사람들 하는 짓 배우면 안 돼요. 구체적으로 물으면 구체적으로 답변해야지요. 사실관계 확인 좋아하잖아요. 사실관계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공식적으로 4차례 이상 양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회신에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담당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남자는 교수의 질문이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를 아직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뭔가 그에게는 독특하게 반복되는 동일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저희는 지금까지 박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이메일에서 사건 관련해서는 모두 회신해드렸습니다.”

“‘사건 관련하여 양수창 대표와의 면담을 요청합니다.’라고 4차례 이상 공식적으로 이메일로 요구하였는데 그에 대한 회신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인정합니까?”

“그거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본인이 답변을 썼잖아요. 사실관계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답변했거나 제 업무가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한테 돌리면 되는데 이메일 직접 써서 보낸 담당자가 당신 아닙니까? 당신이 쓴 이메일 회신에는 그 부분에 대한 일언반구 회신이나 언급이 없었습니다. 맞습니까?”

“후우!”


이젠 새로 온 여자 직원 앞에서 멋있게 대학교수를 물리치는 선배 직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곤란할 이유가 없는 게, 증거로 이메일이 있잖아요. 이메일에 그 내용이 없는 걸 우리 둘 다 아는데 계속 직접 답변하는 걸 피하는 이유가 뭐죠?”

“또 다른 용건은 뭐가 있으시죠?”

“답변만 하면 돼요.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돼요. 본인이 답변을 그냥 안 한 겁니까? 아니면 위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라고 지시가 내려온 겁니까?”

“저희는 항상 이메일 회신을 해드렸습니다.”

“이메일 회신 내용에 그 부분이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결코 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또 그냥 넘기고 다음 단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다음 질문이 무엇입니까?”


오늘 대화에서 계속 그냥 다른 걸 물어보면 넘어가 주던 교수가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고 문 것을 절대 놔주지 않았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그거 제가 전달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본인이 한 행동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자고 묻는데 뭘 전달해 준다는 거예요? 본인이 보낸 이메일에 왜 그 내용이 빠져 있는지 대답할 수가 없습니까?”

“사건 관련하여 문의하셨던 내용들은....”

“사건 관련하여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그 부분에 대한 일언반구 답변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건 제가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될 수 있습니다. 강준성 씨. 내가 지금 똑같은 질문은 여섯 번 했습니다.”


교수의 표정과 순간이었지만 번뜩하는 느낌이 들며 날카롭게 변했다고 느꼈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아니, 문제 될 수 있다구요. 지금 우리는 면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청문회에서처럼 협박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지금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시면 저희는 면담을 계속 진행하기가 곤란합니다.”

“지금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갈 궁리를 하는 분 같아요. 전 단지 질문을 했을 뿐인데...”


순간 남자가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지금 여기서 어디로 도망을 가요?”

“저와의 면담을 회피하시고 도망가시려고 한다구요.”

교수는 결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얼루듯 몰아세웠다.

“조그만 핑곗거리라도 생기면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핑곗거리라니요?”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요 7분 사이에 내 언성이 높아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도 저도 안되면 유치하게라도 사실관계를 부인하여 감정을 흔드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이 난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라는 것을 감안했어야 하는데 남자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 내가 말한 사실관계가 진실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뭐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라는 말씀이신지...?”

“지금 내가 방금 말한 대로 7분여간 대화에서 나는 언성을 높인 적이 없고,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무슨 객관적인....?”

“후우! 강준성 씨가 바쁜 사람이고 결정권도 없는 사람이라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남자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워봐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교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이 어린 남자애를 코너로 몰아세워서 내가 무엇을 얻겠다고 하는 짓인가?’

“네.”

“지난번엔 이런 상황에서 강준성 씨가 나랑 대화하다가 소리를 지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었어요. 기억하죠?”

“...”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잔병의 기억을 그는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사실관계 확인이라는 미명 하에 끄집어내고 있었다.


“‘저희 일도 바쁘고 더 이상 응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소리 지르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그게 우리 마지막 통화였어요. 기억납니까?”

“박 선생님이 그때 언성을 높이셨던 것 같아요.”

“그것도 나중에 녹취된 거 들어보면 알 거예요. 다 녹취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걸 제가 왜....?”

“강준성 씨한테 협박을 해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구요. 협박을 할 위치도 안돼요.”

“그런데 왜 하시고 계시죠?”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자신의 생각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교수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강준성 씨가 그렇게 느끼고 계신가 보죠.”

“좀 전에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계속 물어보셨잖아요.”

“거짓말을 하니까... 그건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사실관계 확인 아닌가요? 아니 ‘방금 전 7분간 내가 언성을 높인 적이 없습니다.’ 했더니 그쪽에서, ‘아니요. 언성을 높였습니다.’라고 해서, ‘만약 내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그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라고 확인한 게 협박입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나열하는 전공 서적 같은 스타일은 남자가 태어나서 결코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이한 린치였다.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길 원하시죠?”

“공정하게 일처리를 해주기를 원합니다.”

“후음”


묵직한 숨소리가 남자의 고민을 더 가중시켰다. 결코 트집을 잡을 수 없는 정당하고 교과서 같은 요구.

하지만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위치도 능력도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사실 있는 그대로 일처리를 공정하게 처리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네.”

“어쨌든 행정직원이라 정식 외교부 공무원이 아니고 위치가 아닐지라도, 지금 자신이 담당 직원이라고 내 앞에 면담하겠다고 나온 사람이라면!”

“네.”

“신분이 정확하게 뭐가 되었든, 현재는 외교부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본인이 받는 월급은 크던 작던 국민이 내는 세금에서 나오는 거고 나는 세금을 내는 국민이니까... 재외국민으로서 나는 보호를 받아야 할 마땅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저희도 도움드릴 수 있는 건 도움드립니다.”

이제 어떻게 해서든 그저 어떻게 해서든 그를 보내고 싶은 생각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면 대표와의 면담이 두 번째였어요. 얘기가 끊겼는데...”

“네.”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면담이 가능할까요?”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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