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는다는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마

똑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는 건 잘못이라 할 수 없다.

by 발검무적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애공(哀公)이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없으니, 아직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공자의 원픽제자 안회(顔回), 몇 번이나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 장에서는 안회(顔回)의 도덕적 자질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공자의 설명을 빌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대나 후세의 학자들이 안회(顔回)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사실관계만 보는 것이겠으나, 스승 공자가 그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에 대한 평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내리는 공자의 기준이 담겨 있고, 공자가 무엇을 높이 평가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인해 공자가 이 대화를 듣거나 공부하는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 장의 마지막은, 시사하는 바가 큰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할만하다. 그래서인지 주자 집주에서 이렇게 길지 않은 내용에 비해 상당히 긴 주석이 붙어 있는 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장에서 애공이 한 질문은, 뒤에 배울 선진편의 6장에 계강자(季康子)가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공자는 그 질문에 이 장과 똑같은 대답을 한다. 제후에 해당하기 때문에 대답을 좀 더 간략하게 한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안회라고 대답한다는 점에서 내용이 같다.

먼저, 주자는 이 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갑(甲)에게 노여운 것을 을(乙)에게 옮기지 않고, 전에 잘못한 것을 뒤에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顔子가 克己의 공부가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이를만했다. 命이 짧았다는 것은 안자(顔子)가 32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금은 없다고 말씀하고, 또 아직 배우기 좋아하는 자를 듣지 못했다고 말씀하였으니, 이는 깊이 애석히 여긴 것이요, 또한 참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얻기 어려움을 나타내신 것이다.”

흔히 이 장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지 않았다는 것과 한번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이해될만한 내용이 아님을 먼저 밝혀둔다.

간단히 문장 하나로 정리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서는 뒤에 정자의 설명을 통해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마지막 문장에 대해 주자는, 그 문장이 일찍 죽은 출중한 제자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실로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이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주자에게서 바통을 받은 정자(伊川)가 안회(顔回)에 대한 사실관계부터 정리하며 설명을 시작한다.

“안자(顔子)의 화냄은 상대방에 있었고, 자신에게 있지 않았으므로 옮기지 않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일찍이 다시 행한 적이 없으셨으니, 다시 잘못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두 가지 실천하기 어려웠던 행동 중에서 첫 번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기뻐하고 화냄이 (자신의 감정에 있지 않고 상대방의 행한) 일에 있다면, 이것은 도리상 마땅히 기뻐하고 화내야 할 경우인 것이요, 혈기에 있지 않다면 옮기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순(舜)임금이 사흉(四凶)을 처벌할 때에 화낼 만한 것이 저들에게 있었으니, 자신이 무슨 관여가 있었겠는가? 마치 거울이 사물을 비춤에, 모습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저쪽에 달려있는 것과 같아서 사물에 따라 대응할 따름이니, 어찌 화를 옮김이 있겠는가.”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장을 해설하는 근래의 서적들을 보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침 뱉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식의 해석이 많다. ‘화를 옮기지 않는다.’라는 개념을 특정한 A에게 화가 난 것을 아무 상관없는 B에게 풀지 않는다는 정도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다. 그것이 아님을 정자는 이 주석을 통해 풀어주고 있다. 자신의 감정상태가 조절할 수 없거나 다른 이유로 불쾌할 수 있다. 그것을 정자는 이 글에서 ‘혈기’라고 표현하였다. 다른 일 때문에 기분이 나빠있을 수도 있고, 그저 혼자만의 다른 생각이나 지난 일에 대해 생각하다가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이 날카로워져 있거나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그 감정에 휘둘려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앞서 현대의 학자들이 해석했던 범주를 포함하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해석이다.

상대방의 언행 때문에 기쁘거나 화가 났다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경우라고 인정한다.

즉,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인정한다.

다만, 상대의 언행이나 지금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 이전에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 감정에 휘둘려 아무 상관없는 상대나 일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경우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진정한 극기(克己)’라고 주자와 정자는 설명한 것이다.


정자는 이 경우를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순(舜)임금의 예를 든다.

여기서 말하는 ‘四凶’은 ‘공공(共工)과 驩兜(환도), 삼모(三苗)의 군주와 곤(鯀)’을 말한다. 《<書經》 <虞書 舜典>에 “共工을 유주에 유배하고 驩兜를 숭산에 유치하고, 삼모(三苗)를 삼위에 몰아내고 곤(鯀)을 구산에 가두어 네 사람을 처벌하시자 천하가 크게 복종했다.”라는 내용을 말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며 다시 또 사례를 들었는데 굉장히 형이상한 적인 사례라 이해를 위한 것인지 상급자들의 철학적 의론 수준을 고양시키려 한 것인지 조금 의아한 부분이 등장한다.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것은 비추는 사물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니 기준과 판단이 필요한 사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본래의 사물에 담겨 있을 뿐, 거울은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는 의미로 감정에 휘둘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사람은 거울이 아님에도 거울이라는 극단적인 예까지 보여주며 극기(克己)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두 번째, ‘똑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안자(顔子)의 지위(경지)와 같으면 어찌 선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이른바 선하지 않다는 것은 다만 약간의 잘못이 있는 것이니, 잠시라도 잘못이 있으면 곧 알았고, 알기만 하면 곧 다시는 싹터 나오지 않게 한 것이다.”

먼저 아주 현실적인 해설로 시작한다. 안회(顔回)정도 되면 사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기도 어렵다는 말을 하고 약간의 잘못이나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알았고, 알게 되면 바로 그런 일이 계속 진행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을 하고 나서 그 잘못을 수습하거나 고치는 단계의 한참 윗단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면, 하고 나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닫는 이는,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자이고, 그나마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지적받게 되면 사과하고 고친다. 이것도 대단하다고 할만한데, 정말로 자신을 다스리고 공부하고 수양하는 이라면, 훨씬 더 그 언행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뭔가 잘못된 행동이 나오는 순간 그것이 잘못이고 이상한 것이라고 느껴 바로 고치거나 더 이상 진전하지 않도록 정리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안회(顔回)의 수준은 그 단계를 넘어서 행동에 앞서 뭔가 행하려 하기 전에 그 기미(幾微)를 느끼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 그것이 언행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삼가는 수준의 극기(克己)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처음 이 설명을 듣는 이라면, 이런 경험을 해보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많으니 도대체 이 경지가 어떤 것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일로 예를 들어보자. 너무도 친한 소꿉친구인데, 그 집의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의 사업이 쫄딱 망해서 가난해졌고, 심지어 결혼한 남편마저 하고 있던 가게가 쫄딱 망하고 사고로 그 남편까지 갑작스레 죽은 친구가 있다. 그런데 돈독한 우정은 변치 않아 그 친구를 위해 맛있는 거라도 사 먹이고 싶어 불러냈다.


그런데 어떤 복장을 하고 나갈 것인가? 명품백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있는 멋없는 멋 내서 그 친구에게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맞을까? 그렇게 옷을 입고 나간다. 만나기로 한 식당을 배려할 때, 그저 화려한, 너무도 유명한 한눈에 보기에도 으리번쩍한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것이 맞을까?


그 사소한 여러 가지 것들이 결국 ‘사려 깊은 배려’라는 것으로 안배가 되기 마련이다.

즉, 똑같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늘 자신의 행동에 앞서 상대나 상황을 모두 몇 번이나 감안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대개의 일반인들은 차라리 그 친구를 안 보는 편이 훨씬 낫겠다며 그 귀찮은 만남을, 배려를 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삶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상황이 하루에도 수차례 발생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저 본능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안회(顔回)가 했던 그 두 번 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장자(張橫渠)는 “자신의 마음에 부족하다고 느껴진 행동을 두 번 다시 싹트지 않게 한 것이다.”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이 주석들 뒤에는, 혹자와 정자의 문답이 이어진다. 이 마지막 주석의 대화는, 이 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호학(好學)’이 바로 전 장에서 공자가 자부했던 그 호학(好學)의 개념과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일깨워줌과 동시에,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의 공자 가르침의 독특한 개념 ‘호학(好學)’이 과연 무엇이고 왜 그렇게 중요한 개념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어, <논어>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이 들어 전문을 소개해도록 한다.


혹자가 물었다. “시서(詩書) 육예(六藝 ; 중국 주(周) 나라 때 행해졌던 교육과목.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70명의 공자 제자가 익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부자(夫子)께서 유독 안자(顔子)만이 배우기 좋아했다고 칭찬하였으니, 안자(顔子)가 좋아했다는 바가 과연 어떤 배움이었습니까?”

이에 정자가 말하였다.

“배움으로써 성인에 이른 방법이었다.”

“배움의 방법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정자가 말씀하였다.


“천지가 정기를 쌓아 (만물을 낳았는데) 오행의 빼어난 정기를 얻은 것이 사람이니, 그 본체는 참되고 고요하다. 이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오성(五性)이 갖추어져 있으니, ‘仁, 義, 禮, 智, 信’이라 한다. 그리고 형체가 이미 생기면 외물이 그 형체에 닿아 마음이 움직인다. 그 마음이 움직여 칠정(七情)이 나오는 것이니 ‘喜, 怒, 愛, 懼, 哀, 惡, 欲’이라 한다. 감정이 이미 성하여 더욱 방탕해지면 그 본성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정(情)을 단속하여 중도에 합하게 하고, 그 마음을 바루어 본성을 기를 뿐이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마음을 밝혀서 갈 곳을 안 뒤에야 힘써 행하여 도에 이르기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자(顔子)의 ‘예(禮)가 아니면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동하지 않은 것’과 ‘노여움을 옮기거나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음’과 같은 것이니, 이는 그 좋아함이 독실하고 배움에 그 요령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지킨 것이요, 저절로 변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몇 년만 수명을 연장해주었다면 며칠이 되지 않아 저절로 화(化)하였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침내 생각하기를, ‘성인(聖人)은 본래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니,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여겨, 학문하는 것이 단지 글을 기억하거나 외우며 문장을 짓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그 또한 안자(顔子)의 배움과 다른 것이다.”


조금 어려울 수 있으나 설명해보면, 일단 유학에서 말하는 ‘靜’이라는 개념은, ‘처음 사물에 감응하지 않은 때’ 혹은 ‘감정이 표출되기 전의 상태’를 말한다.


워낙 방대한 개념을 쭉 설명하여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그러하나, 이 문답에서 정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혹자가 물었던 핵심 질문(안회의 배움은 도대체 어떤 배움인가?)에 대한 답변이 농축되어 있는 마지막 문장 되시겠다.


공자 같은 성인(聖人)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라고 유학에서는 설명한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핵심은 어차피 범인(凡人)들은 도달할 수 없는 레벨이니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님에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학문을 한답시며 글을 외우거나 문장을 짓는 것만 하는 세태에 대해 핵펀치를 날리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의미하는 호학(好學 ; 배우기를 좋아함)과 그것을 해냈다고 하는 안회(顔回)의 배움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배움을 통해서도 성인의 경지에 달할 수 있고, 인(仁)을 완성할 수 있으며 도(道)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무작정 공부를 해서 달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나, 배우고 속을 꽉 채우는 기본단계가 이루어지지 않고서 사색하고 실천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없으니 안회(顔回)가 그렇게 하고자 하여 노력하는 단계에서 안타깝게 죽어서 완성하지 못하였으나 만약 살아있었다고 한다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 완성을 했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한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왜 배우는가?’에 대한 화두를 여러 각도에서 설명해주는 방식을 옹야편에 시작에서는 보여준다. 배우는 것이 왜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단계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하였으니 다시 설명하진 않겠다.


뭘 알아야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 되고를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행동과 세상에 대해 시비(是非)를 구분하고,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에 배운다.


내가 제대로 살아갈 눈을 갖기 위해서 배운단 말이다.

배운다는 것은 정보를 취득함에 다름 아니다. 정확한 정보에 기반하고서도 감정이 개입하거나 하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 때문에 감정에 대한 부분을 이 장에서는 살짝 언급해주었다. 그런데 그 감정이라는 것도 갑자기 근거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이 생기는 것도 결국 자신으로부터 말미암기 마련이다.

예컨대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은 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뿐, 그 행동에 어떤 정당성도 담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감정상태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이는, 결국 실수를 하게 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없게 된다.


가난했던 시절이 떠오른다며 갑자기 술 먹은 김에 길가에 서 있는 외제차를 발로 차는 행동은 말 그대로 술 먹은 개가 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가?


국정원에서 트위터로 장난질을 한 범죄에 대해 수뇌부의 결제 없이 임의로 체포와 기소를 했다는 이유로, 수사팀에 배제되었다며 눈물을 흘리던 검사는 감히 검찰 수뇌부에 항명했다는 괘씸죄로 좌천되었다며 국정감사장에 나와 상관을 디스 하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런 그를 보며 상관 역시 국정감사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악어의 눈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정의의 사도로 등장한 그는 화려하게 서울 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까지 화려하게 컴백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정의를 위해 국정원의 범죄를 단죄하려 하였는지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이 정의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며 판단해 그를 검찰 수장으로까지 임명했던 이들은 그가 다시 칼을 들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아차! 잘못 판단하였구나!’했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도 이제는 그가 단지 정의를 위해 그랬던 것이 아니었음을 눈치챈 듯하다.


똑같은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아주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번 실수를 통해 잘못된 판단으로 그릇된 사람을 정의의 사도로 보았다면, 이제 제대로 보고 제대로 판단하여 잘못이 싹트지 못하도록 그 기미(幾微)를 자르는 용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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