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시간을 끌고 자신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B녀의 헛소리는 수시간에 걸친 내용으로 제출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 녹취내용에 박 교수의 자백이 들어있고, 모든 성희롱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던 B녀의 주장이 허황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분명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 결정적인 증거를 수시간에 걸친 녹음과 300여 장이 넘는 녹취록 안에서 찾기 위해서는 귀걸이하고 겉멋에 신경 쓰는 공판검사(검찰관)가 찾아냈어야 하는데, 그것을 모두 검토하고 온 검찰관의 얼굴이 재판 시작부터 누가 보더라도 티가 날 정도로 어둡고 안 좋았다는 것이다.
제대로 문건을 검토하지도 않았을 여자 판사의 얼굴은 여전히 당당하고 자신의 법정이라고 우길 준비가 되어 있는 표정이었다. 여자 판사가 검찰관에게 먼저 증거에 대한 내용 중에서 검찰에서 공소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주장이 있으면 제시하라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으음. 그게...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인정하는 부분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건지 증인에게 다시 물어봐도 될까요?”
“네?”
황당한 검찰관의 질문에 여자 판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늘은 확실하게 B녀의 증거로 박 교수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범죄사실을 까발리는 조작 증거가 되었더라도 내밀 수 있을 거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법정에 들어선 터였다. 그런데 뜬금없는 검찰관의 태도는 그녀의 비위를 건들기에 충분했다.
“워낙 증거로 제출된 녹취의 양이 방대해서 정확하게 어떤 부분을 의미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싶습니다.”
유독 땀을 흘리기까지 하던 삐쩍 빠른 신경질적인 표정의 검찰관은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왜 마스크를 계속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마스크를 하고 있어도 그가 긴장한 듯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과 당황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증인! 듣고 있지요? 지금 검찰관의 질문에 대해 답해주세요.”
마뜩잖은 표정으로 여자 판사가 마이크에 대고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B녀의 기계조작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물어보시면.... 전반적으로 자기가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게...”
짜증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검찰관이 마이크에 대고 언성을 살짝 높였다.
“189페이지를 보면, 피고인이 그런 행위를 했냐고 증인에게 물었는데 증인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어요. 이게 뭡니까?”
“네?”
B녀보다 여자 판사의 눈이 더 동그레졌다.
“검찰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는 겁니까? 잠시 휴정합니다.”
여자 판사가 다급하게 의사봉을 들어 휴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황급히 검찰관에게 자신에게 오라는 표정을 하며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장 변호사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멍하니 핸드폰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장 변호사는 뭐라고 가서 안 해요?”
박 교수가 황당한 상황에 양쪽을 번갈아보고 있다가 장 변호사에게 물었다.
“나는 안 부르잖아요. 그런데 지금 검찰관이 한 얘기는 맞아요?”
“내가 정리해준 문건 안 봤어요? 핵심이 되는 증거물 페이지만 추려서 라인 단체방에 올렸잖아요.”
“아, 보긴 봤는데요. 어떻게 자기가 불리할 증거를 저렇게 두껍게 만들어서 버젓이 낼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서요.”
그때였다. 조금 날카로워진 높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무죄의 증거라구요.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진행하는 재판에 동조할 수 없어요.”
검찰관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소리에 장 변호사와 박 교수의 시선이 꽂히자 여자 판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찰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달래듯 뭐라고 말하려는데 검찰관이 짜증 난 사춘기 여자애같이 법정에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의 돌발행동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주영희의 변호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박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박 교수는 혹시나 싶어 바로 밖으로 나가도 되냐고 물었고, 여자 판사는 15분간 휴정한다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바로 복도로 뛰어나온 박 교수는 검찰관을 찾았지만, 검찰관이 나온 문과 달랐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재판은 어차피 비공개였기 때문에 다른 방청객이 없어 법정 앞은 조용했다. 여기저기 찾아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라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찾았는데, 귀에 익은 짜증 나는 목소리가 화장실의 맨 안쪽 칸에서 들려왔다. 검찰관이었다.
“엄마! 내가 이런 재판은 배정받지 않게 해달라고 했잖아! 엄마가 그렇게 해준다고 했잖아. 이건 뭐 피해자라는 여자애가 낸 증거가 무죄의 증거인데, 지가 그런 소리를 한 것도 감안하지 않고 버젓이 증거로 냈는데 어떻게 이걸 가지고 유죄를 확정해? 아, 몰라! 증거가 없어도 그냥 우기는 게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불안했는데, 이대로 가면 경력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야? 아 난 모르겠으니까 그냥 이 재판 빠질래. 난 그냥 빠질 테니까 그렇게 엄마가 알아서 조치해줘.”
가만히 옆칸에 들어가 혹시나 싶어 문을 잠그고 가만히 그의 통화를 듣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엄마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목소리만 확인하지 못했어도 이 나라에 깔려 있는 동성애자나 어린 사춘기 소녀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통화 정도라고 착각할 정도의 황당한 통화였다. 그렇게 문이 쾅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밖으로 나온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내가 왜 마스크 하고 다니는지 몰라? 괜히 내가 유죄로 만든 애들이 나한테 칼질이라도 하면 어떨지 몰라서 이렇게 목숨 내놓고 겁나는 일을 하는데, 아무리 한국인이라고 하고 판사랑 다 짜고서 유죄를 결정지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이렇게 명백하게 무죄의 증거를 피해자 측에서 내고 판사까지 내용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그냥 인정해버렸는데 지금 와서 이걸 어떻게 하냐구! 몰라! 난 지금 판사한테 얘기하고 나올 테니까 엄마가 다 세팅 잘못한 거니까 엄마가 수습해.”
그가 완전히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찬찬히 손을 씻고 법정으로 돌아왔다. 여자 판사가 다시 법정으로 돌아왔지만, 검찰관은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검찰관이 갑자기 말 못 할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도저히 재판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증인 심문을 계속 진행할 수 없겠습니다.”
“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검찰관은 재판을 내팽개쳐두고 도망가버린 것이었다. 장 변호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뭔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장 변호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 들어 보일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다음 일정을 다시 잡는 거죠. 아마 판사는 검찰관을 긴급하게 바꿔서라도 재판을 그대로 밀어붙일 겁니다.”
장 변호사가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의미심장한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증거물에 대해서 철회를...”
여자 판사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아니어도 어떻게 한번 서로 합의하에 결정된 증거물을 철회할 생각을 합니까?”
다른 쪽을 멍하게 쳐다보며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사람처럼 장변호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아닙니다. 철회하겠다고 끝까지 말하지 않았잖아욧!”
여자 판사가 다시 짜증스러운 철 그릇 긁는 듯한 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뛰쳐나간 검찰관에게 소리를 지를 일이지, 이게 나한테 그럴 일입니까?”
장 변호사가 지지 않고 비아냥거리듯 그녀에게 투정했다. 여자 판사가 뭐라고 하려다가 고개를 떨구며 다시 캘린더를 보며 물었다.
“증거물을 채택했으니 오늘 증인 심문을 더 하는 건 굳이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증인 B녀가 9월 초에 네덜란드와 1년간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때문에 따로 일정을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맞지요? 변호인?”
그녀가 방청석의 주영희 변호사에게 물었다.
“아, 네. 그렇죠. 더 이상 B녀에 대한 증인 심문은 바로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여자 판사가 다시 장 변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면 다음 A녀가 주요 증인이니 주요 증인 심문으로 들어가는 거 상관없지요?”
“네. 그렇게 하시지요.”
장 변호사가 너무 선선하게 대답하는 것이 박 교수는 마뜩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음 증인 심문은 11월 13일에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괜찮지요?”
“네. 그리고 원래 우리 측 증인은 그다음에 진행합니까?”
“아 그 목사 딸이라고 했던 증인 말입니까?”
“네.”
“그러면 피해자 측도 그에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 제삼자 증인 찾아보세요.”
‘응?’
박 교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여자 판사가 주영희의 변호사에게 판판(목사 딸)의 증언하는 것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제삼자 증인을 찾아보라고 했다. 증인을 찾아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만, 상대편 변호인단도 아니고 판사의 입에서 그런 지시가 나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판사는 검찰관의 돌발행동에 어이가 없었는지 당황한 듯 황급히 날짜만 말하고 사라졌지만, 박 교수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장 변호사. 나 좀 잠깐 봅시다.”
“나 바쁜데...”
장 변호사가 늘 그렇듯 바로 법원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길게 안 걸릴 테니 우리 저기 대기실에서 이야기 좀 합시다.”
떨떠름해하는 장 변호사를 끌고 대기실에 겨우 앉아 박 교수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검찰관이 한 행동도 그렇고, 그 핵심적인 증거라는 게 결국 내 무죄의 핵심적인 증거이고 B녀가 A녀와 공조해서 일을 꾸몄다는 것이 밝혀졌잖아요.”
“아니죠. 직접적으로 속기록에 그런 내용이 들어가진 않았으니까 아직은 아니라고 봐야죠.”
“그러면 더더욱 오늘 그대로 인정할 게 아니라 B녀에 대한 증인 심문을 강행했어야 하잖아요.”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돌발적으로 검찰관이 자리를 비워버리면 정상적으로 재판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제출된 결정적인 증거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교수님. 아직도 잘 모르시겠어요? 판사는 우리 편이 아니에요. 아니 저쪽 편이라는 게 너무 명백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기피신청을 하든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잖아요.”
“지금 저 여자 판사 개인과 싸우는 게 아니라구요. 지금 우리 편에 서주는 사람이 이 나라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장 변호사의 어이없는 질문에 박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 말은, 어차피 재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니죠.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교수님도 충분히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잘 아는 장 변호사의 대책은 뭡니까?”
“후우! 결국 교수님의 주장도 그렇고 우리가 분석한 것도 그렇고 문제의 핵심은 랴오츠리엔이잖아요.”
“그래서요?”
“다음 증인 심문이랑 우리 측의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 목사 딸의 증언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장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그것도 오늘 방식처럼 어떻게 해서든 뭉개려고 들 거잖아요.”
“다른 뾰족한 수가 교수님한테는 있으세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 변호사가 내 법률대리인이잖아요?”
박 교수는 이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목이 메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남은 증인 심문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어요. 법정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장 변호사는?”
“최악은 지난 첫 우리 면담 때 이야기했지만, 전과가 없고, 피해사실이 명확하게 입증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마도 대만 달러로 10만 달러 이하의 벌금으로 끝날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유죄로 몰고 가기에 오늘 일도 그렇고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기운 내서 끝까지 싸워봅시다.”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장 변호사 말고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다음 증인 심문에서 승부를 보도록 합시다.”
다음 증인 심문까지는 두 달 반이 넘는 기간이 아직 남아 있었고,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보내고 혼자서 버티는 박 교수에게는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