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는 모든 것에, 늘 걱정하신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이 효에 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지나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한다."
이번에 효에 대해서 물은 이는 지난 장의 맹의자의 아들이다.
이전에도 설명한 바가 있지만, 누가 묻느냐에 따라 공자의 대답은 늘 다르다.
a.k.a CASE BY CASE.
내용을 보면 참 뻔한 듯한데, 실제로는 좀 묘하다.
왜 '오직' 자식이 병들지나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하시는 걸까?
부정과 도치는 강조할 때 쓴다.
실제로 부모님의 자식의 모든 것을 걱정하신다.
이유? 없다.
본능이고 마음이 그렇게 시키니까 하시는 거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신경 쓰이고 걱정되신다.
그것은 말을 못 하는 아기였을 때부터, 손주의 부모가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부모이다.
위와 같은 내용에 근거하여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더욱 조심하고 삼가라는 의미를 더하곤 한다.
그런데 그것은 고리타분한 유학에서 말하는, '내 신체는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함부로 상해서는 안된다.'정도로 간단하게 인식할만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가볍게 한숨만 내쉬어도 부모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자식의 안색을 살핀다.
시험을 망쳐서
남자 친구와 싸워서
살쪄서
핸드폰을 떨어뜨려서
병들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
내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주실 듯 늘 걱정하신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어떻게 해주면 되는지 몰라도
그래도 함께 한숨을 쉬시고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리신다.
얼른 마실 물을 가져다주시고
맛있는 것을 챙겨주시며
등을 쓰다듬으시고
그저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그것이 부모님이시다.
그것이 공자가 말한,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하신다는 내용의 실체이다.
늘, 쉼 없이 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을 근심하신다.
사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주석에 나온 부분이다.
주자의 해석에 의하면,
"옛 주석에서도, '자식이 부모로 하여금 자식이 불의에 빠지는 것을 근심하게 하지 않고, 오직 자식의 질병을 근심하게 하여야 효가 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 통한다"라고 설명한다.
당시의 기준으로 '옛 주석'이라는 것을 보면, 더 오래된 이야기일 게다.
질병은 피할 수 없지만, 불의에 빠지는 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고문에서는, 죄를 지어 교도소를 가는 수준의 범죄만을 불의라 칭하지 않는다.
돈을 써서 불기소를 받거나 1심의 유죄를 무죄나 집행유예로 트는 것을
'결백'이라 칭하지 않는다.
내가 낳은 자식은 누구보다 부모가 잘 안다.
그 부모에게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 쉬운 것도 아닌 시대이다.
부모는 안다.
당신이 적당히 불의를 저지르고
적당히 불의를 덮어주고
적당히 다른 사람들도 그러니까
나도 그러는 거라면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그거
분명히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불효다.
그러지 마라.
그런 짓 해서 챙긴 돈으로
부모님 용돈 챙겨드린다고
기뻐하실 부모님 없으시고
그렇게 당신이 그런 짓을 해서
승진하고 좋은 차 탄다고 해서
기뻐하실 리 없다.
'오직' 병드는 것만을 걱정하시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자는 알고서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