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아주 많이.
子曰: "吾與回言終日, 不違, 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이야기했는데, 그가 내 뜻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인가 싶었다. 그가 돌아간 뒤 그가 혼자 있을 때 지내는 바를 살펴보니 역시 내 뜻을 발양하기에 충분했다. 회는 어리석지 않은 이였다."
안회.
혀에 칼을 달고 있는 사람인 양 그렇게 다른 이들에 대한 평가가 엄격했던 공자의 애제자.
위 문장만 보더라도 공자가 제자 안회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자는 쪼잔하게 편애를 할 수준의 사람이 아닌, 성인군자급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저 스승의 말이라면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네네'하는 수준의 바보인가 싶어 가만히 그가 배우지 않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살펴보았다는 꼼꼼하기 그지없는 무서운 스승이었던 것이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배우는 이들의 눈빛으로 그들의 이해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나 역시 일방적으로 배우는 입장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런데 매우 뛰어나고 잘 가르치며 연구도 잘하는 교수들도 거의 없었지만
'도제 방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방'이라며 연구실을 가리키는 학교의 분위기 의거하여
그들이 가르치지 않을 때의 모습이나 생활을 본의 아니게 목도하게 될 일이 많았다.
너무도 실망스러워 타산지석을 삼기조차
어려울 지경의 보기 흉한 모습뿐이었다.
본래 도제 방식이란,
선생의 집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그대로 배우는 방식으로
말 그대로 24시간을 함께 생활하며 선생에게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24시간까지는 아니지만 학교에 있는 동안
그 연구실에서 함께 이것저것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밥도 술도 함께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윗글에서 공자가 안회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그것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자신이 높은 경지의 지향점을 설명하고 말하는데
의문을 갖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그저 묵묵히 모든 것을 흡수하고
알아들은 이처럼 행동하니
정말로 이 녀석이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서도
동의하고 체행하는가? 싶었을 것이다.
체행.
여기서 <논어>에서 강조하는 궁극적인 경지가 나온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배우고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배워 고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을 다 배우고 나서
어쩌자는 것인가?
배운 후에는 '익혀야 한다.'라고
논어 '학이'편 첫 장에 공고한 바 있는 공자였다.
체행, 이른바 그것을 내가 직접 행하지 않으면
그 배움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다가 하다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익힐 정도로 몸에 배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체행' 되시겠다.
청문회의 단골손님으로
대학교수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율사입네하며 판검사 출신의 변호사들도
정부 요직에 많이 들어앉고
그들의 비행(a.k.a. 불법 치부 행위)이 발각되어
개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모임이나 회동에 참가해보면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움이라 여기지조차 않는다.
'다들 그러지 않나?'라고.
다들 그러는 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다들 그런다고 해서 그게 맞다는 건
될 수 없다.
법을 안다고 법꾸라지가 되어
치부 행위를 하고
본래 법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일탈하는 것들이
논리를, 정의를, 지식을 논하며
공작처럼 화려한 깃털을 자랑해서는 안된다.
그게 사회가, 국가가 망해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면서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긴다.
구한말, 일제 식민치하 당시
친일파들이 그러하였고
조선시대에
나라와 상관없이
당파와 당색으로 물고 뜯고 하던
그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그들을 감히 윗글의 안회에 비하는 것조차
감히 할 짓인가 싶어 살 떨리긴 하지만
그들은 그저 지식을 가장한 장사꾼이고
법꾸라지이고 법비일 뿐이다.
당신이 그들만큼 상류층이 아니라고
나는 그럴만한 돈도 지위도 없다고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나라꼴을 걱정하는 듯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당신도 매일 마주친다.
적당히, 그냥, 이 정도면
남들은 더 하는 데 뭘.
이따위 안일함과 현실과의 타협이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부모와 아이를
그리고 이 사회를
좀먹기 시작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