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작
식당에 도착하니 영환이 이미 밥을 한술 뜨고 있었다. 찌개에서 김이 폴폴 나는 것을 보니 이제 막 나온 것이 분명했다. 영환이 먼저 주문해 두겠다기에 대원은 고민하다 오늘의 국을 골랐다. 여러 찌개를 고를 수도 있고, 매일 바뀌는 국 메뉴를 고를 수도 있는 식당이었다. 대원은 늘 메뉴판에 있는 것들보다 칠판에 큰 글씨로 엉성하게 쓴 오늘의 국 메뉴를 좋아했다. 국도 새로, 글씨도 새로. 어쩐지 오늘만을 위해 늘 새로 바뀌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마침 오늘의 국은 미역국이었다. 대원에게는 생일 같은 날이라 공연히 들떴다. 알맞게 점심 메뉴까지 오늘을 축하하는 것 같았다. 의자를 빼고 마주 앉자 찬으로 나온 조기구이를 골라 먹던 영환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봉투의 겉면에는 귀여운 글씨로 ‘대원 아저씨 예매 내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왼손으로는 봉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다 놓으며 영환에게 손짓했다.
자기 딸한테 전화 좀 걸어 봐.
왜? 밥 먹고.
안돼. 지금 줘 봐.
신호가 가는 전화를 건네받으면서 대원은 지갑을 열어 삼십만 원을 꺼내 영환에게 건넸다. 곧이어 통화 연결음이 끊기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재희야, 대원 아저씨야. 잘 지내지?
아저씨! 받았어요? 그때 알려 준 거 알죠. 늦게 가면 굿즈 못 사니까 미리 콘서트장 앞에 가야 해요! 신분증 꼭 챙겨 가서 현장 발권하고요. 아저씨 불안해서 내가 우편으로 받게 하려고 했는데 전부 현장 발권이더라고요.
지금 받았어. 정말 정말 고맙다. 아저씨가 밥이라도 사 주면서 부탁해야 하는데 이렇게 전화로만 고맙다고 해서 미안해. 아빠한테 티켓값이랑 합쳐서 삼십만 원 보낼 테니까 꼭 받아. 한 푼도 빼먹지 말고 받아서 너희 오빠 다음 콘서트 갈 때 보태.
참! 아저씨 앞자리고 공연장 단차가 별로 없으니까 자꾸 너무 앞으로 기울여서 보지 말아요. 앞에서 키 큰 사람이 자꾸 앞으로 나서면 뒷사람 하나도 안 보여.
재희는 영환의 둘째 딸이었다. 영환이 딸내미가 자꾸 뜯지도 않으면서 같은 앨범을 수십 장 산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가 팬카페에 가입하지 못해 애를 먹던 차에 번쩍 재희 생각이 났다. 주영에게도 물어봤지만 마찬가지로 잘 모르는 눈치였다. 요즘 그런 콘서트는 모두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하는 데다, 경쟁이 치열해 아저씨가 티켓을 살 수 있겠냐며 걱정했다. 급한 대로 주영에게도 부탁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해본 적이 없다며 거절했다. 수심에 빠져 있던 참에 주영이 흘린 말이 힌트가 된 것이다. 아빠 동료 기사님들 중에 자식이 콘서트 다니는 애들 없어? 아이돌 좋아하는 애들이면 그런 거 잘할걸? 그 말을 듣고 곧장 영환에게 재희를 만나게 해 달라며 사정했다.
영환은 흔쾌히 재희와 약속을 잡아 줬다. 영환의 집에 들어선 대원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재희의 방 안 가득히 앨범과 포스터 따위가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열렬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부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 안예은 씨 포스터 사진과 앨범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방을 상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가 슬슬 벗겨지는 아저씨 방이 그런 모양이라면 면이 서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머뭇대며 재희에게 팬카페 가입을 도와달라 부탁했다. 재희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는지 클릭 몇 번으로 뚝딱 해결했다. 등업 조건에 맞춰 게시물도 작성해 두었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모든 게시판을 다 볼 수 있을 거라며 으쓱댔다. 콘서트는 예매일이 아직 되지 않아서 날짜에 맞춰 매표하고 연락을 주기로 했다. 이 모든 게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니. 대원은 허탈하기도 하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드디어 자신도 공식적으로 안예은 씨 팬카페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에.
팬카페에서는 안예은 씨를 다들 예은 님이라고 불렀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대원도 입에 예은 님이라는 호칭을 익혀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희의 어깨 너머로 연신 화면을 흘긋대자 재희가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이걸로 아저씨 핸드폰이랑 컴퓨터에 로그인하시면 돼요. 이거 카페는 어떻게 들어가냐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들어가면 돼요. 그리고 이거 꼭 읽어 보시고요. 핸드폰 줘 보세요. 핸드폰에 로그인해 드릴게요. 그리고 이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글을 볼 수 있어요. 우선 게시글을 쓰거나 하지는 말고요. 보통 도배하면 아이디 썰리니까 분위기 보면서….
도배? 갑자기 도배를 왜 해. 아니 도배를 했는데 아이디가 왜 썰려. 아니, 아이디가 썰리는 건 또 뭐야. 여기에 집 고친 이야기도 해야 해?
그 도배 말고요. 게시판에 한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로 계속 글을 올리는 걸 도배라고 해요. 그런 거 하면 아마 강퇴될 거예요. 그게 아이디가 썰리는 거예요.
요즘 친구들 보니까 이렇게 테이블 놓고 사인도 해 주고 대화도 하던데 콘서트에서도 그런 거 해?
그건 팬 사인회요. 앨범 사고 앨범에 사인받는 건데 콘서트랑 달라요. 가만… 아저씨 퇴근길은 알아요?
알지! 퇴근하는 거 아냐.
비슷한데요. 개념이 조금 달라요. 콘서트 끝나고 안예은 씨가 퇴근할 거 아니에요? 아마 공연장 밖에 사람들 몰려 있을지도 몰라요. 안예은 씨 집에 가는 거 보려고. 가끔 선물도 주고받고 차 창문 내려서 막 인사나 대화도 나누는 가수들도 있어요. 하여튼 그걸 퇴근길이라고 해요.
그럼 그때 앨범에 사인을 부탁해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죠. 아저씨. 요즘 가수 좋아하시면서 왜 옛날처럼 좋아하려고 그래요. 뭐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해요. 직장인에 대한 매너. 그런 걸 좀 지키며 살자는 거예요. 아저씨 퇴근하려고 하는데 직장 상사가 막 불러. 부르더니 퇴근 전에 자기랑 가위바위보 딱 세 판만 해 달래요. 그까짓 거 해 주면 되지 싶기도 해. 근데 상사 뒤에 보니까 그거 해 달라는 사람이 50명 줄 서 있어 봐요. 퇴근 때마다!
그건 좀 곤란하지. 50명 그거 다 해 주면 나는 집에 언제 가.
그거예요. 아저씨는 한 사람이지만, 한 사람 해 주면 해 달라는 사람 그 뒤로 배로 불어나니까. 우리 서로 퇴근길이 있는 현대인답게 퇴근길은 막지 말고 보내 주자. 제게 주어진 콘텐츠와 시간을 충분히 즐기자. 뭐 저는 이런 마음이에요. 응원봉은 없으시고…. 이건 팬카페 주의 사항인데 꼭 읽어 보시고요.
재희는 한참 동안 팬카페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과 교양 있게 공연을 관람하는 법을 설명했다. 세상이 전과 다르게 아주 많이 바뀐 것이 또 한 번 실감 났다. 무대 위의 빛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나와 비슷하게 삶을 꾸리는 직장인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쏙쏙 되었다. 대원도 교양 있는 현대인이 되고 싶었다. 자신은 눈에 띄기보다는 묵묵히 뒤에서 응원하는 그런 아저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날은 정신이 없어 재희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 영환에게 대신 전했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이 여우 같은 아저씨가 딸내미에게 가는 용돈에 수수료를 뗀 것이 아닌가. 대원은 재희에게 정말 고맙고 영환이 너무 괘씸해 이런 꾀를 낸 것이다. 전화로 금액을 이야기해 버렸으니 영환은 꼼짝없이 돈 전부를 재희에게 전해야 할 테다. 대원은 봉투를 주머니 가장 안쪽까지 넣었다. 행여 잃어버리면 다시 뽑아드릴 수 있겠지만 이왕이면 잃어버리지 않는 게 제일 좋겠다는 재희의 말에 긴장이 된 탓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니 봄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새 공기에 축축한 퇴비 냄새가 났다. 이맘때쯤 아내는 꽃나무들을 잘 지켜보라고 했다. 미묘한 퇴비 냄새가 금세 꽃향기로 뒤덮이는 순간을 즐겨야 한다고 말이다. 대원은 오랜만에 다른 가수의 테이프를 꺼내 카 오디오에 집어넣었다. 아내가 봄이면 즐겨 듣던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