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엄마의 마지막 선물

엄마가 없다는 걸 상상할 수 없어..그러니까 아프지마..

by 아이쿠

요즘 엄마가 이상하다.

엊그제는 하얀색 블라우스와 초록색 멜빵 치마를 사 왔는데 오늘은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 무늬가 들어간

여름 원피스를 사 왔다. 반짝이는 분홍 구두까지.

동생것도 없이 내 것만 사 오니 마치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 같아 기분이 더 좋았다.

나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학교까지 걷기 좋게 주로 편한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어쩌다 한 번은 사줄 수 있지만 이렇게 계속 원피스와 치마, 스타킹을 사준 적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요즘 제일 예쁘게 입고 학교에 다닌다.



저녁밥을 먹는데 자꾸만 돈을 쓰는 엄마가 못마땅한지 아빠가 한소리 했다.

"자네 요즘에 뭐단다고 돈을 그렇게 쓴가? 지선이 옷은 지난번에도 사더만 오늘도 사고 혹시 나 몰래

꼼쳐둔 돈 있는가?"

"내가 뭘 꼼 쳐둔 돈이 있겄소? 이쁜게 하나 샀제"

"혹시 돈 있으면 좀 줘. 돼지 축사 손 좀 보게"

난 혹시라도 내 옷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싸울까봐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별말 없이 지나갔다.


엄마는 오늘도 아침부터 바쁘더니 점심을 먹고 난 지금도 바구니와 호미를 챙기고 있다.

"엄마 어디가?"

"엄마 밭에 일 다녀올 테니까 동생들이랑 집에 있어"

"나 따라갈래!! 쟤네는 할아버지한테 맡기고 가자"

평소 같았으면 손 망가지니까 밭에 오지 말라는 엄마가 오늘은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데리고 갔다.

요즘은 밭에 봄배추를 심는 작업을 하기에 신작로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오는 배추밭으로 향했다.

엄마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선아 엄마 왜 이렇게 졸리지?? 엄마 잠깐 쉬어야겠다" 라며 밭 한쪽의 그늘에 가 누웠다.

난 엄마 옆에 앉았다 같이 누웠다 땅을 팠다 덮었다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냐. 와서 일은 못하고 잠만 자다 가네"

"엄마 괜찮아. 나도 저번에 학교 다녀오는데 너무 힘들어서 종국이랑 길가에서 자다 왔어."

나의 말에 엄마가 한바탕 웃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지선아 오늘은 그만하고 집에 가야겄다."

엄마는 오늘도 좀 이상하다. 평소에는 내가 가자고 졸라도 "좀만있다 가자"를 수십번 반복하고서야 겨우 집에 가는데 오늘은 엄마가 먼저 가자고 한다...


신작로에 도착하니 언니 오빠들이 놀고 있었다.

"엄마 나 놀다 갈래"

"그래 그럼 엄마는 집에 갈 테니 저녁밥 먹을 때 와"

언니들 따라 고무줄도 하고 비석 치기를 했다. 그리고선 요즘 재미를 붙인 공기놀이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영신아 밥 먹어라"

"아야 도인아 밥 먹어라"

사방에서 엄마들이 부르는데 다들 노는데 정신 팔려 듣는 척도 안 하니 엄마들은 어쩔 수 없이 애들을 데리러

신작로로 나왔다.


"하여튼 놀았다 하면 밥때 인지도 모르고 놀구만"

"긍게. 알아서들 들어오제 꼭 데릴러 오게 하네"

"영신 엄마!! 요즘 지선이 엄마 이상하지 않아?"

"왜?? 난 요즘 바빠서 얼굴 못 봤는데 뭔 일 있는가?"

"아니 요새 사람이 힘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집에 오면서 보니까 밭에서 누워있더라니까.

그 사람이 어디 밭에 누워있을 사람인가? 근디 저번에도 일하다 쉬러 들어가고 그러던디..."

"그라제...그럴 사람은 아니제..어디 아픈가?"

난 아줌마들의 말을 듣다가 갑자기 겁이 났다. 엄마 아까도 누워 있었는데...진짜 어디 아픈가?

왠지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손등에 있던 돌을 집어던지고 두 손을 불끈 쥐고 달음 박질을 했다.



"엄마!! 엄마!! 엄마 어딨어??"

"어 지선이 왔냐. 밥 먹어라"

부엌에 있는 엄마는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저녁밥을 먹으며 아빠는 또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꺼냈다.

"자네 요새 진짜 어째 그란가? 저 큰 원피스는 뭐데? 지선이한테도 한참 크더만 ..돈이 남아도는가?

그러면 축사 고치게 좀 달라니까!!"

엄마는 아빠의 불평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대꾸도 없이 밥만 먹었다.

옷을 내가 산 것도 아닌데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밥알이 모래알처럼 까슬거린 느낌이었다.


"흐흑흐흑흐흐"

깊은잠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귀신인가 싶어 무서운 생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덜덜 떨었다. 계속되는 울음소리에 아빠도 잠이 깨어 밖으로 나가는게 느껴졌다.

"자네 잠 안 자고 여기서 뭐단가? "

아빠의 말을 듣고서야 울고 있던 귀신이 엄마라는걸 알았다.엄마는 대답도없이 한참 동안 말없이 흐느꼈다.

"지선 아빠 내 말 잘 들어. 내가 오래 못 살 것 같아. 온몸에 도통 힘이 없고 이것이 자는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니 내가 참말로 죽을병 걸렸는갑네. 처녀 적에 사주팔자를 볼때마다 단명한다고 하더만

진짜로 죽을병인가 싶어 서러워 죽겄네."

"자네 뭔 소린가?"

"나야 죽으면 죽은갑다 하면 그만이지만 저 어린것들은...지선 아빠도 이제 술 그만 들고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저 어린것들 똑바로 키울 사람이 이제 당신밖에 더 있소? 특히 우리 지선이는 딸이라 더 걱정이네...

그래서 내가 요즘에 지선이 옷을 사요. 나 없으면 이쁜 옷도 못 입어보고 남한테 천대받을까 싶어서.."

엄마는 그러고서도 또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듣는 나도 슬퍼서 목이 메었다.


아빠는 술을 끊기도 정신 똑바로 차리기도 싫었는지 다음날 억지로 엄마를 데리고 광주의 큰 병원을 갔다.

병원에서는 병명도 원인도 잘 모르겠다며 비슷한 증상의 약을 지어주며 이거라도 먹어보라고 했다.

아빠는 키우던 돼지도 한 마리 잡아서 한동안 끼니마다 챙겨주며 엄마 몸보신을 시켰다.

제물이 된 돼지 때문인지 큰 병원의 처방 덕분인지 엄마는 그제야 몸에 기운이 차고 일어날 수 있었다.

"돼지 축사 고치자니까 아예 돼지를 잡아불게 하네잉"

아빠도 한시름 놓였는지 웃음띤 얼굴로 농담을 했다.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엄마는 더 이상 내 옷을 자주 사지 않았다.

이제 예쁜 원피스를 사주지는 않지만 난 엄마가 옆에서 웃고 있는 지금이 더 좋다.

엄마 없다는건 상상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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