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다리기가 있겠습니다. 라는 방송으로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윗동네 아랫동네로 편을 나눌 예정이니 참여할 수 있는 분들은 모두 나와 주세요."
분명 우리의 운동회이지만 이번에도 어른들이 나섰다.
시골의 작은 학교 운동회는 온 동네 잔치였기에 오늘 모든 어른들이 다 모여 우리보다 더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남녀가 뒤섞여 줄 앞에 서자 선생님은 양쪽 사람 수를 세기 시작했다.
"아랫동네가 한두 사람 많으니까 빠져주세요"
선생님의 요청에
"우리 쪽은 여자가 더 많으니까 그냥 합시다."로 응수했다.
선생님도 그 말이 맞는지 고민하는 사이
"그 짝도 요짝도 여자수는 비슷하구먼 그러네"
윗동네 아저씨도 지지 않고 말을 꺼내니
"그럼 남녀 사람 수까지 맞춰서 합시다."
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자존심 대결에 모두가 예민해져 있었다.
분명 아까까지는 다 같이 모여 술 한잔 건네며 형님 동생을 외쳤으나 승부의 세계는 역시 냉정하다.
"땅"소리와 함께 "영차 영차 영차" 기합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졌고 "뒤로 누워!!"라는 절박한 외침에 양쪽 모두가 몸을 최대한 뒤로 눕히며 버티니 줄 중간에 묶어놓은 빨간 끈이 이쪽으로 조금 넘어갔다 다시 돌아와 저쪽으로 조금 넘어갔다 넘실넘실 춤을 추니 끈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 눈도 요리 굴러졌다 저리 굴러졌다 눈이 빠질 지경이다.
나의 바램과 달리 리본이 자꾸 윗동네 쪽으로 넘어가니
나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삐삐"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선생님이 왼팔을 들며 윗동네 쪽이 승리임을 알리자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윗동네 어른들과 수진이와 쌍둥이들이다.
나와 종국이 경진이 영신 언니는 "하아"라는 탄식과 함께 아쉬워할 뿐이다.
"자리를 바꿔서 다시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바꾸는 사이 작전을 짜는 어른들이다.
"앞 뒤로 힘이 센 사람들을 배치하고 약한 사람들은 중간으로 자리를 좀 바꿉시다."
호식 아빠의 작전에 우리 아빠는 어느새 앞쪽에서 중간으로 밀려나 있었고 여자라고 중간에 있던 엄마는 앞쪽에 서 있었다.
아빠의 굴욕이 마음 아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승리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줄을 잡고 서 있던 양쪽 어른들은 또다시 "땅" 소리와 함께 "영차 영차"를 외치며 끌어당겼다.
"뒤로 누워"라는 또 한 번의 절박한 외침에 양쪽 모두 또 온몸을 뒤로 젖혀 반은 누운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있었으나 한번 끌려간 줄은 계속해서 윗동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삐삐" 호루라기 소리와 선생님의 오른팔이 윗동네 쪽을 향했고 우리는 또 한 번 "하아"라는 탄식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우리 동네 어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까 지선이 엄마 말이 맞네!! 땅이 미끄러워도 너무 미끄럽네"라는 호식 아빠의 얼토당토않은 핑계에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긍게 아까 뭐하러 땅 하고 인사하고 있냐고 해서 미안하요" 라는 유머를 너도나도
던지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이제 학생들의 달리기가 시작되겠습니다.
달리다가 중간쯤 종이에 쓰인 지시사항을 확인하고
그 지시에 따라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우승입니다."
진짜로 중간쯤에는 커다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지시에 따라 어떤 아이는 천막에 앉아 구경하던 한 할머니를 붙잡고 같이 뛰었고 어떤 아이는 할아버지를 붙잡고 뛰었다.
내 차례다. 제발 발 빠른 사람과 뛰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엄마와 달리기]
나는 사방을 보며 엄마를 찾았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사정없이 뛰기 시작했다.
"엄마 더 빨리 더 빨리 뛰어"라고 끌려가면서도 소리쳤다.
아까 땅과 인사하던 엄마는 온데간데없이 빠른 속도로 뛰었지만 발 빠르기로 소문난 우리 담임 손을 붙잡고 뛰는 아니 담임 손에 질질 끌려가는 수진이에 비하면
역부족이었다. 또 지고야 말았다.
아쉬움에 뒤돌아보니 경진이는 술에 취해 앉아있는
아빠손을 끌어당기며 뛰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비틀비틀 엉덩이를 땅에서 떼내는 경진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모두가 박장대소하며 눈물이 나도록 웃었지만 경진이는 창피하고 속이 상해 눈물을 흘리며 아빠와 뛰고 있으니 순둥이 모범생 경진이가 불쌍해 보였다.
"이번 순서는 학부형들의 이어달리기입니다. 남녀 골고루 수를 맞추어 동네별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첫 주자랑 마지막 주자를 제일 빠른 사람이 달립시다"
나는 오늘 호식 아빠를 다시 보았다.
평소 농담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작전도 잘 짠다.
아저씨 말에 따라 아빠가 1번 주자로 나섰고 호식 아빠가 마지막 주자가 되었다.
역시 아빠는 날씬한 몸을 바람에 맡긴 듯 금방 한 바퀴를 돌고 와 바통을 동네 아줌마에게 넘겨주었다.
아줌마는 금방이라도 다른 동네 아저씨들에게 따라 잡힐 듯 아슬아슬하게 한 바퀴를 돌아 외숙모에게 바통을 넘겼다.
걸음이 느린 외숙모는 슬슬 뒤처지기 시작하는데 그게 억울했던지 외숙모를 앞지르려는 수진 엄마 팔을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염병. 이게 뭔 짓이다냐. 얼른 놔야 이거 놔"
라고 소리치는 수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진 엄마는 앞서려고 팔을 뿌리치며 발버둥 치고 외숙모는 절대 보낼 수 없다는 각오로 팔짱을 끼고 발버둥 치니 이번에도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닦아내며 웃어대니 점심에 곁들인 반주에 취한 건지 웃음에 취한 건지 모두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외숙모의 바통을 이어받은 영지 언니 아빠는 머리를 휘날리며 앞서려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수진 엄마의 바통을 이어받은 수진 아빠도
혀를 빼꼼 내밀며 앞으로 전력질주를 하였다.
술 취한 경진 아빠는 바통을 준다는 것이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바람에 다음 주자가 재빨리 뒤돌아와 주워 뛰었으나 이미 뒤처져도 한참 뒤처졌으니 이번 운동회에 경진이 동네는 망한 듯하다.
마지막 주자 호식 아저씨는 반 바퀴는 더 마중을 나가 바통을 이어받으니 이번엔 기필코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였다.
눈에 불을 켜고 달리고 달려 결국 우리 동네는 1등을 하였다.
이번 운동회 동네별 시합의 첫 1등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얼싸안고 좋아하니 노는 것은 우리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보다.
우리도 뒤따라 얼싸안고 좋아하니 이것이 단결의 힘인지 상품의 힘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겼으니 되었다.
"오늘의 마지막 경기는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오자미로 복바구니 터트리기를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 편에 서서 같이 터트려 주세요."
"삐삐"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너도 나도 오자미를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청군이기에 파란 바구니를 향해 계속 던지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위를 쳐다보느라 목도 아프고 던지느라 팔도 아프고 바구니는 꿈쩍도 안 하고 마음은 조급하고 눈물이 날 지경인데 어른들이 힘을 보태어 던져내니 드디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오자미를 던져 맞추니 어느 순간 박이 열리며 종이가루가 뿌려져 나왔다. 그리고 [ 풍년기원 ] 글귀가 적힌 기다란 종이도 함께 보였다.
우리가 이겼다. 청군이 이겼다. 청군이 만세를 부르며 우리들의 운동회는 끝이 났다.
오늘은 박속의 글귀처럼 내 마음도 엄마, 아빠도 모두의 마음이 풍년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