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학교 운동회를 하는 날이다.
학교 교문 근처에 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운동장 위로 달아놓은 만국기 역시 가을바람에 펄럭이니
오늘 하루를 기대하는 나의 마음도 설렘으로 살랑거렸다.
교문 양 옆으로 경축 가을 운동회라는 글이 적힌 간판이 붙어있었고 확성기를 통해 울리는 신나는 음악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하얀 분가루로 그린 100m 달리기 선과 400m 계주 달리기 선은 걸음걸이마저 다급한 뜀박질로 뛰게 하는 운동회 아침 풍경이다.
엄마, 아빠들은 물론이고 학교 주변 동네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운동장 한쪽 천막 그늘 아래 앉아서 선생님의 개회 선언을 지켜보았다.
몸풀기로 하는 국민체조를 따라 하는 것마저도 오늘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제자리 걷기 시~~ 작!!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국민체조 음악에 맞춰 숨 고르기까지 끝이 나자 기다리던 진짜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청군이다. 하얀 체육복 위에 파란색 머리띠를 하고 백군과 함께 섞여 지난 몇 주동안 연습했던 곤봉 돌리기 장기자랑을 했다.
내 곤봉에 내 얼굴이 맞을 만큼 서투른 솜씨지만 엄마 아빠 앞에서 이렇게 단체로 음악에 맞춰 장기자랑을 하니 마음만은 전국 대회에 나온 듯 했다.
우리의 장기자랑을 본 엄마들은 우리만큼이나 벅찬 감동으로 박수를 쳐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100m 달리기를 위해 줄을 맞춰 출발선에 섰다.
2학년 달리기는 진규가 1등을 하였다. 평소의 진규로 보아 당연한 결과다.
엄마는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1등을 한 진규를 보며 상기된 얼굴이었다.
진규가 1등 상품을 타 엄마에게 전해주니 엄마의 얼굴은 더 흥분되었다.
이번엔 3학년인 내 차례이지만 이길 자신은 없다.
아이들이 적어 반 아이들이 한꺼번에 같이 달리니 남자아이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땅!!" 출발 총소리와 함께 재빠르게 출발했으나 역시나 쌍둥이가 이미 저 멀리 앞서고 있다.
운동 신경이 없는 종국이 경진이보다는 내가 더 빨리 들어와 꼴등은 면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괜히 더 숨을 헐떡거리며 엄마를 쳐다보니 "우리 딸 잘했네"라며 웃고 있었다.
아이들의 달리기가 끝나자 선생님은 하얀 가루를 넣은 초록색 통을 끌고 왔다 갔다 하며 지워진 달리기 선을 다시 그려냈다.
"학부모님들의 백 미터 달리기가 있겠습니다.
모두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어른들 달리기는 동네 대표들이 나섰기에 이건 동네 자존심이 걸려있다.
모두들 출발선에 서서 꼭 1등을 하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손에 힘을 꽉 쥐고 총소리가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동네 1번 주자는 종국이 엄마이다.
나에게는 외숙모인데 평소 행동이 느리니 걱정이 앞선다.
"성님(형님). 이를 악물고 빨리 뛰시오잉. 성님 할 수 있어!!" 엄마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외숙모는 달리기인지 경보인지 모를 속도로 뛰어 보는 엄마를 답답하게 하였다.
힘이 센 여장부인 엄마는 출발선에 서서 같이 뛸 다른 주자들을 살펴보더니 이 정도는 문제없다는 듯 여유로움을 보였다.
"땅" 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출발한 엄마였지만 웬일인지 땅에 엎어져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죽자고 뛰었으나 1등을 놓친 지 오래였다.
다행인 것은 평소에도 양반처럼 느릿한 경진이 엄마 덕에 꼴등은 면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하더만 뭐단다고 엎어져서 땅이랑 인사하고 있소?"
호식이 아빠의 농담에 엄마도 머쓱해 웃으며 변명을 하였다.
"뭔 땅이 겁나 미끄럽소. 안 다친 것이 다행이제. 호식이 아빠도 뛸 때 조심하시오"
다 같이 뛰는 운동장에서 혼자 미끄러져놓고 땅 핑계를 대는 엄마였다.
난 오늘 엄마를 다시 보았다. 운동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힘만 센 사람이었다.
놀랍게도 말라깽이 작은 체구의 아빠가 눈썹이 휘날리고 다리가 안 보이도록 뛰더니 1등을 했다.
의외의 활약에 너무 놀라 자리에서 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난 오늘 아빠도 다시 보았다.
소주와 책을 세상에서 제일로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달리기를 이렇게 잘할 줄이야.
아빠가 뛰는 내내 박수를 치며 응원한 엄마는 아빠가 1등선을 끊는 순간까지도 쉬지 않고 박수를 쳤다.
아빠도 1등 상품을 타서 엄마에게 전해주자 또 박수를 치니 오늘 엄마 손바닥이 남아날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은 파란색과 하얀색의 커다란 공 굴리기다.
청군인 나는 파란색 공을 굴리는데 앞이 잘 보이질 않으니 공이 어디로 가는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겠다.
공과 땅바닥을 번갈아 보니 어지럽고 답답할 뿐이다.
다 같이 어질어질하게 공을 굴렸으나 우승은 수진이가 속한 백팀이 하였다.
백팀의 점수가 올라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점심시간이기에 아쉬움보다는 즐거운 마음이다.
저마다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엄마가 싸온 김밥과 여러 음식을 차려냈다.
우리 돗자리 한편에는 아까 1등을 한 진규와 아빠가 타 온 상품도 놓여 있어 보는 우릴 뿌듯하게 했다.
엄마는 오늘도 야심작 간재미를 무쳐와 선생님들에게 맛을 선보였고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은 어느새 선생님들과 한자리에 모여 술을 따르기 시작하더니 주거니 받거니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종국이 혜진이와 둘러앉은 외숙모네도, 달리기에서는 모두 꼴찌를 한 경진이네도 공 굴리기를 이긴 수진이도 모두 식구들대로 둘러앉아 김밥을 먹으며 활짝 웃는
그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
달리기 1등을 한 날쌘돌이 쌍둥이는 상품을 양반다리 위에 올려놓은 채 김밥을 먹는데 그런 쌍둥이 볼을 만져주며 아직도 칭찬을 하는 쌍둥이 엄마의 모습이 그중 제일로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