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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쿠 Sep 25. 2023

오전 11시, 에쎄 체인지 1mg와 캔커피

8시면 가게 문을 연다. 매장 불을 밝히고 계산대 컴퓨터를 켠다. 냉장고 커튼을 젖히고는 커피포트 전원 버튼을 누르기 위해 창고로 향한다. 물이 끓는 사이 과일을 진열하고 어제 날짜의 신선식품을 빼내어 반품 박스에 넣는 것으로 기본적인 영업 준비가 끝났다. 8시 20분. 더 이상 분주해서는 안 된다. 출근하는 손님들이 담배를 사러 오는 시간이니 카운터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 날씨와 기분에 따라 믹스커피 혹은 블랙커피 한 잔을 타 카운터 옆 한자리에 비치된 노트북을 켠다. 뉴스를 읽거나 브런치 글을 읽으며 본격적인 온갖 잡일을 시작할 9시를 기다린다. 6시 기상 후, 아이들과 남편이 먹을 아침을 차리고 혼잡한 출근길에 쓴 에너지를 잠시 충전하는 휴식 시간이자 오늘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되새겨야 할 긴장의 시간으로 매일 아침 반복되는 하루 시작의 루틴이다.


손님들의 출근시간이 끝나면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시작한다. 일하는 사이사이 손님이 오면 계산대를 향해 있는 힘껏 뛴다. 큰 마트처럼 카운터만 지키는 직원과 진열, 매장 청소를 하는 직원 따로 두고 싶지만 작은 마트에서 여러 직원을 두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러니 매일 뛸 수밖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창고에서 라면 상자들을 내어 봉지라면과 컵라면을 순서대로 진열하다 카운터 쪽을 여러 번 확인한다. 진열이 끝나갈 무렵 기다리던 단골이 캔 커피 하나를 들고 카운터로 향하는 게 보였다. 


오전 11시 또 다른 루틴이 시작된다. 라면박스를 내려놓고 카운터를 향해 뛰었다.

"담배도 드려요?"

"네"

에쎄 체인지 1밀리를 꺼내어 커피와 함께 계산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 저기서 여길 뛰어오는데도 무릎이 아프네요. 하하하"

웃기지도 않는 나의 농담에 예의상 미소를 지을 뿐 소리 내 웃는 법은 없다.



매일 오전 같은 시간에 와서 담배 한 갑과 캔 커피 하나를 사는 단골이기에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지만 매번 담배를 살 거냐고 확인한다. 예전에 묻지도 않고 습관대로 카운터에 담배를 내려놓는 나를 보고 살짝 붉어진 얼굴로 "오늘은 담배 안 살게요."라고 민망한 듯 말했기 때문이다.

"어머. 죄송해요. 저 때문에 금연할래도 못하고 강제로 담배 피우게 생겼네요."

또 실없는 말로 그 상황을 웃어넘겼지만 워낙에 점잖은 손님이기에 불필요한 상황을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아 매번 물어보고 담배를 꺼낸다.


일하느라 카운터를 비우면 보통 다른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목소리 높여 나를 부르는데 조용한 성격의 손님은 찾아 나서는 법이 없다. 마냥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린다. 시간이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직접 매장을 돌며 나를 찾아 작은 목소리로 "계산해 주세요"라는 말을 부탁하듯 조심스럽게 한다. 타고난 성격인 것도 같고 1인 자영업자의 피치 못할 사정(화장실, 창고 출입 등)을 잘 헤아려 배려하는 거로 생각된다. 몇 번 겪고 나니 또 미안한 마음에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11시가 안 되는 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계속해서 출입구와 카운터를 확인하게 된다. 손님 맞춤형으로 카운터에서 맞이하고 싶었으나 오늘도 무릎에 무리가 가도록 뛰어야 했다. 담배와 커피를 들고 가게 문을 나서는 손님을 보며 오전에 해야 할 일을 잘 마친 것 같아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위에서 말했듯 손님은 가게를 한다. 잘나가던 가게는 코로나가 시작하자마자 영향을 받더니 금세 타격을 입었고 결국 있던 직원도 내보내고 혼자서 꾸리고 있다. 쉬는 날 없이 일을 하기에 매일 오전 11시 출근길에 우리 가게에 오는 것이고. 이곳에 들러 커피와 담배를 사는 것이 하루 시작의 루틴이다. 나의 8시 20분처럼, 바쁘고 치열할지 모를 오늘을 위해 마음을 굳건히 하는 시간이자 출근 전 마지막 여유를 즐기는 낭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워낙 말수가 적어 대화는 거의 없다. 말은 없지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얼굴을 마주하니 친밀감이 쌓여 장사가 안된다고 하면 걱정이 되고 충혈된 눈을 하고 나타나면 무슨 일이 있는지 묻게 된다. 하루에도 수백 명을 상대하는 직업 특성상 모든 손님에게 친절하고 관심을 가질 순 없다. 대화를 많이 하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매출에 큰 도움을 주는 고마운 손님(역시 난 장사꾼) 정도면 친분을 유지하며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지만 이 손님은 어떤 경우에도 속하지 않는 유형이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하루의 1분을 공유하는 그 시간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정든 마음 아닐지 싶다. 물론 점잖은 말투와 행동도 한몫할 테다.


몇 달 전, 11시의 손님이 며칠 동안은 9시에 들어와 여느 때처럼 캔 커피를 들고 담배를 찾은 적이 있다.

"요즘 출근을 빨리하시네요?"

"이사하려고 은행에 대출 상담하느라고요."

"어머! 이사 가요? 정말요? 손님은 저에게 칸트 같은 분인데?! 왜요?!."

이사라는 말에 놀라 지금껏 해본 적 없는 말들을 허둥대며 이어갔다.

"손님 매일 같은 시간에 오셔서 제가 칸트라고 그러거든요. 이사 가면 어쩐지 허전한 11시가 될 듯해서 많이 아쉽네요!"

칸트가 산책하는 걸 보고 이웃들이 시간을 알았다지. 바쁘게 오전 일 처리하다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이 손님의 등장으로 지금이 11시 언저라는 걸 알고 이후에 해야 할 일까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니 진정 나에게 칸트와 같은 존재라 말할 수 있다.

"이사하게 되면 꼭 알려주세요. 작별 인사라도 하게요."

역시나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어 달이 지난 지금까지 작별 인사가 없는 걸 보니 앞으로도 우리 가게의 칸트로 남을 모양이다. 나의 11시는 바쁜 일을 끝내고 한 번 쉬어가는 때이자 거래처들이 몰려 들어오기 직전 약간의 여유를 갖는 시간이다. 치열한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담배와 커피로 마음을 다잡는 손님과 겹치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첫 루틴이 무사하고 즐겁기를 바라며 가끔 농담이랍시고 혼자서 떠들기도 하는데 칸트 손님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고객 응대용 미소를 자연스럽게 짓는다. 나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없고를 판단 후 웃는 웃음이 아닌 습관화된 고객용 미소다.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실패했다는 민망함에 서둘러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곤 한다. 부끄러운 마음 접어두고 포기하지 않고 농담을 걸다 보면 가끔은 진짜로 웃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희열을 느끼며 손님도 나도 즐거운 1분이 교차한다.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시답잖은 농담과 고객용 미소로 어제와 같은 우리의 11시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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