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채널을 돌리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반가운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 진행자 밥 로스의 프로그램을 넋 놓고 보았다. 마법 같은 시간에 빨려 들어간다. 전혀 긴장감 없는 느긋함으로 하얀 캔버스 앞에서 재치 있는 말과 그림을 슥슥 삭삭 기분이 가는 대로 그리며 '참 쉽죠~' 하면서 씩 웃는 모습.
보면 볼수록 편안하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예전 시골 골방이나 동네 이발소에서 한 번은 본듯한 정겨운 그림들을 그려낸다. 그러기에 예술계에서는 그를 언급조차 안 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그들 눈에도 아마 우리의 눈에서도 촌스럽게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열광했던 것은 그의 편안함과 재치와 마술 같은 그림 그리는 순간의 모습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그의 그림은 뭔가 비범하거나 대단히 어려운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정하기도 쉬운 덧칠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에 우리가 취미로 그리기에 좋다고 했다.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호수가 되기도 나무가 되기도 산이 되기도 그의 기분에 따라 변하면서 그의 마술이 완성되는 그런 그림을 그린다. 소재도 단순하여 그의 그림은 늘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을 보면 아마 내용보다는 그림 그리는 그 자체를 맘껏 즐기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장난하듯 그림을 그리다 어쩌다 멋진 부분이 나오면 ‘실수하는 게 아닙니다. 행복한 우연이죠’ 하면서 또 씩 웃고 넘어가고 또 그림을 그리다 말고 생뚱맞게 ‘느긋하게 사세요 집착하지 말고’ 엉뚱한 말 하고는 슥슥 삭삭 ‘참 쉽죠~’ 한다.
오늘을 그린다
어김없는 하루를 여는 새벽 4시. 어둠을 뚫고 새벽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하얀 세상 도화지가 서서히 밝게 나타난다. 오늘 받은 세상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묘한 긴장과 흥분이 된다. 마치 달리기 출발선에 선 선수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하루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면 큰 계획은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름 그날의 기분에 따라 그리며 또 수정하며 하루를 그려 나갔는 데도 내가 그렸는 하루의 모습에서는 ‘참 쉽죠~’란 말이 안 나온다.
그것은 아마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하여 더 잘해 보려는 욕심에 어제의 그것과 비교를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 밥 로스 처럼 그냥 느낌대로 하루를 그려 나가면 되는데 설령 실수를 하면 능청스럽게 덧칠로 덮어 씌우면서 때론 농담도 하며 아량으로 편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면 나름 잘 살은 하루의 그림이 완성될 텐데 그런 여유조차 잊고 자존심과 의욕과 쓸데없는 고집에 사로 잡혀 끌려가며 살다 보니 편안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상반되는 요소가 필요해요. 그림에서는 어둠과 빛, 빛과 어둠 하는 식으로 이어집니다 빛에 빛을 더하봤자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어둠에 어둠을 더해봤자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런 겁니다. 삶도 마찬가지예요 슬픔도 가끔 조금씩 겪어봐야 나중에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기쁨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밥로스
그렇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에만 초조하게 사로잡혔던 것이다. 빛에 빛을 계속 더하기만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과 빛, 빛과 어둠. 슬픔과 기쁨,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행, 불행과 만족 등을 조금씩 섞어가는 삶의 자연스러움의 여유를 가졌으면 빛과 기쁨과 만족을 매일 누릴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설령 오늘 없었다 해도 내일은 그것을 기다려 보는 기대와 여유가 있었을 텐데 그런 삶을 뒤로하고 오로지 의욕과 경쟁만 되풀이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꿈과 목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올바른 길 위에서 편하게 오늘의 그림을 그리다 혹시 못하였더라도 그로 인해 다음에 오는 더 큰 기쁨을 기다릴 수 있는 희망과 여유로운 마음만 놓치지 않고 오늘을 산다면 나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