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남겨둔 빙산의 일각을 알아 차리자 그것이 한것이다
자신을 아는가.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지금하고 있는 일에 따른 편협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며 무의식 속에 남겨둔 나머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만 아는 것이다.
그래서 생기는 혼자만의 오해가 있다
우리는 불신과 부정의 말을 자주 말한다.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꼬투리인지 언제 적 한말인지 잘 모르는 말 한마디를 가지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며 오해를 하여 스스로 상처를 받는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어떤 맥락의 말인지도 가물가물한데 말이다.
어느 날 A와 자주 가던 고깃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 나이쯤이면 훈장과도 같은 살아온 잔재들이 몸에 남아 있는데 갑자기 없던 것이 생기면 지금의 현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두툼한 손톱을 파고든 상처와 빡빡 깎아 내민 머리가 그의 지금의 삶을 보여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충만하여 물불 가리자 않고 뛰어다니던 사람인데 주변의 아늑한 이야기에 현혹되기를 몇 번 하더니 상처와 배신을 받고서는 '몸으로 일하며 버는 돈이 제일 정직하다'라는 나름의 현실적인 정의로 의식이 냉정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무의식은 귀에 속삭이는 말들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부를 때가 되었는데', '곧 일을 준다고 했는데'등 기대의 말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냉정하게 컨트롤되는 의식의 정당함을 내보이는대도 어쩌다 가벼운 말 한마디에 무의식 속의 기대감이 그 정당함이 무너트리기 일쑤이다. 그러고는 혼자만의 오해를 한다.
우리는 때로 일에 몰두를 하다 보면 현실과 상상을 착각할 때가 있다. 내 마음이 급할수록 아니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더 그것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매사 섭섭함을 이야기한다. 나는 안 그런데 그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서 누가 어디서 이야기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화의 시점, 내용을 꼭 집어내서 따지듯 분석을 해가며 피해의식의 이야기를 한다. 말미에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안되었다고 한다.
무거운 현재의 삶을 내가 아니라 가벼운 타인에게 맡겨놓고 있는 것 이기에 그들이 인정해 주어야만 내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있는 그들은 왜 아직 안 해주고 있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그들도 아직 스스로가 완성이 안되어 혼란을 겪느라 가벼운 말들이 많아졌을 텐데 어떻게 남들까지 책임을 지겠는가
처칠 수상은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라고 말을 했다.
즉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잘될 수 있다는 관점(낙관적)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고생도 기회가 되는 것이고, 잘 안될 것이라는 관점(비관적)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스스로 기회를 고생으로 보는 것 이기에 그 결과는 시작부터 불 보듯 뻔한 것이다. 실례도 필요 없다.
그래서 바라보는 관점을 흔들리지 않게 명확하게 해야지만 자기를 정확히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의식과 무의식과의 다툼이 어렵다면 내가 컨트롤 가능한 보이는 외부 통로의 필터로 거르면 된다. 마치 가래떡의 형상틀과 같은 틀을 장착시킨다면 외부에서도 관점의 형상을 보면서 꾸준히 관리 유지 시킬 수 있다.
다행히 낙천적인 것과 달리 낙관성은 후천적인 학습이 되어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배우고 깨우쳐 형상의 틀을 만들어 쉽게 바라보는 관점을 유지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