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오랜만에 외부 일정이 잡혀 지하철 1호선으로 몸을 옮겼다. 점심 약속이었다. 그리고 마땅히 문이 닫혀야 할 때, 익숙한 기계음이 아닌 기관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사역-내가 탑승한 역에서 진행 방향으로 한 개 역 거리-에서 사상자가 발생해 열차 운영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사고가 수습되는 대로 출발할 예정이니, 조금만 대기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침에는 부평역-내가 탑승한 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3개 역 거리-에서 사상 사고가 있었고, 수습되어 정상 운행 중이라는 뉴스를 봤다. 그러나 반나절이 채 지나기 전에, 하나로 이어진 철로에서 또 한 사람이 생을 버렸다. 인터넷에는 각각 3개, 4개의 기사가 쓰였다.
아침에 치인 사람은 70대 노인이라고 하는데, 점심에는 20대 청년이었다. 노인은 기력이 없었는지 선로에 미리 누워있었고, 청년은 때를 맞추어 뛰어들었다. 서쪽 멀리에서는 살고 싶었으나 살지 못한 수만 명이 존재하는데, 이곳에서는 살 수 있음에도 살고 싶지 않은 이가 존재하는 현실이 아득했다.
오늘(16일)은 자살위기극복 특별위원회라는 기구가 출범했다. 며칠 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제5차 자살예방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제5차라는 말은 이미 네 번의 계획안이 있었다는 것이며, 제1차 계획안은 2004년의 것이다. 그러나 OECD 평균의 두 배로 압도적 1위를 기록하는 자살률은 네 차례의 계획안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교량에 난간을 설치하고, 무해 번개탄을 보급하고, 신고체계를 통합하고, 정신건강검진 주기를 단축한다고 한다. 사실, 학교폭력 대책으로 “멈춰!”를 제시한 것에서 얼마나 더 나아갔는지 의심이 든다. 이미 죽기로 결심한 사람은 그대로인데, 실행을 어렵게, 번거롭게 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보았다. 비극을 돌려 말하지 말고, 선택인 것처럼 가장하지 말고, ‘자살’이라는 사건에 제대로 된 명칭을 부여해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소위 베르테르 효과로 불리는 모방을 방지하겠다는 이유로 기억하는데, 그 이유도 인간을 주체적 존재보다 쉽게 동조되는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며, 병든 사회의 증상이 자살이라고 말한 뒤르켐이 묻힌 지도 백 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증상을 붙들고 해열제만 처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속은 썩어가는데 'OECD 1위'만 피하도록 자살하는 이들을 붙잡아 매는 것이 정말 최선일지 궁금하다.
여기서 어떤 답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사람보다 숫자에 집중하는 일만은 지양하면 좋겠다. 출산율이 문제가 되니 결혼과 연애를 포기한 90년대생에게 출산하라고 말하는 것과, 자살률이 문제 되니 이미 결심한 이들에게 자살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마지막 문장은 뒤르켐의 ‘자살론’ 중 일부를 인용한다.
"자살이 인간의 삶이 어렵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살을 통제하는 방법도 생존경쟁을 덜 어렵게 하고 삶을 더 쉽게 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