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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Mar 15. 2023

안 자랑스러운 K-예비군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다. 나는 스스로를 제법 성실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 문장을 주장하기 어려운 날이다. 오늘 딱 하루 세상에서 가장 불성실하고 무기력하고 불만 많은 사람을 뽑는다면 적어도 본선은 무난히 진출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훈련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마지막 훈련이 전전 직장 시절인데, 2020년 초 팬데믹으로 큰 피해를 입어 쫓기듯 나온 곳이다. 그러니 마스크를 쓰면서 간 훈련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번의 이사 동안 공간만 차지해 근심하게 했던 군복과 군화를 꺼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군복과 군화는 둘 다 꽉 끼어서 혈류를 방해했고, 마음에도 때가 잔뜩 끼어서 고지혈증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대학원생 신분이 되며 하루짜리 학생예비군이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집 근처가 아닌 2시간 거리의 훈련장에 배치되어 일출과 함께 일어나야 했다. 직장인일 때는 하루치 근무를 대신할 수 있다는 작은 위안이 있었지만, 오늘의 출퇴근과 시간 소비는 그야말로 온전한 희생이었다.


   사실 훈련 자체는 고강도의 움직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훈련 시간을 가장 어렵게 한 것은 무임금, 무생산의 활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였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 라거나, ‘이렇게 훌륭한 나라인데 지킬만 하지 않은가(feat. BTS, 박찬욱, 오징어게임)’ 같이 얕은 말들의 향연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다. 그들도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역한 감정이 느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이번에 밀고 있는 키워드가 ‘자랑스러운 K-예비군’인가 본데, 생각이 많아지는 내가 싫었다. 예비군이 필요한 것이라면, 노골적인 국뽕 말고 이 활동을 독려할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일까 고민했다. 


   집에 가는 길에 왕복 여비로 8천 원이 입금되었는데, 훈련장 문 앞에서 택시 기사가 가까운 역까지 5천 원에 모신다며 호객하고 있었다. 이미 오는 데 2천 원을 썼고, 역까지 한 번에 간다고 해도 또 2천 원을 써야 하니 손해다. 긴 생각 않고 군복으로 가득 찬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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