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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by 말자까

봄여름은 한창 망아지가 태어나는 시즌이어서, 입원마방에 망아지가 늘 있는 시즌 한복판의 5월이다. 망아지가 아파서 입원했을 수도 있고, 엄마가 아파서 망아지까지 딸려서 입원해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이면 망아지 집중 관리를 하느라 입원 관리자가 하루종일 붙어있고 매일매일 똥이 어떤지, 얼마를 먹었는지 살펴보는 게 일이다.


반면에, 엄마가 아파서 딸려온 망아지는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똘망똘망하다. 아무래도 아픈 엄마의 젖이 잘 안 나오다 보니, 망아지는 하루종일 엄마 젖만 물어대거나, 아니면 물이라도 먹거나 심지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엄마 따라 풀을 씹어먹는 시늉이라도 해보며 몇 줄기씩 씹어가며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가려고 노력한다.


며칠 전 출산 후 응급 산통으로 어미말이 망아지와 함께 내원했다. 통증이 제어되지 않아 결국 응급 개복 수술로 어미말은 수술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태어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망아지는 난생처음 (!) 엄마와 난데없이 분리되어서 그렇게 울어댔다. 몇 시간의 수술 후 다행히 어미말이 잘 회복하고 일어났다. 보통 마취에서 회복하면 말은 정신이 없고 몸이 다 풀리지 않아서 다소 둔한 걸음걸이를 보인다.


하지만 씨암말들은 망아지를 찾아야겠다는 본능이 먼저 돌아오는 것 같다. 다리는 아직 비틀거리는데도 망아지 찾겠다고 울어대고 두리번대는 통에 회복실에서 입원실까지 말을 제어하며 유도하는 게 역시나 힘들었다. 좀 더 정신 차리고 더 편하게 걸으면 될 터인데 얼마나 마음이 급하신지 도저히 내가 말을 이해시킬 수가 없으니 답답할 지경이다.


사람보다 강한 모성애를 나는 말에게서 종종 느낀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볼 때, 나는 첫 아이의 기절할 듯 힘든 출산을 거치고 산도 밖으로 아기가 나온 후 아기와의 탯줄이 잘리고 이제 끝났다 싶어 정신이 혼미해졌고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아이 얼굴을 확인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동적인 기쁨의 장면은 주로 티비에서나 미화되어 묘사되는 것 같다.


반면, 나에게 출산의 기억은 그 고통이 여전히 더 지배적이고, 이후 시작되는 수면 부족과 수유와의 전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금에야 기억이 어느 정도 정화되고 미화되어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 잡았지만, 사실 나는 출산 이후 모성애가 뿅 하고 바로 생기지는 않았고 내 몸뚱이 힘든 게 더 먼저 반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도 역시 망아지를 잘 안 챙기는 어미말도 아주 간혹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망아지를 아주 얄미울 만큼 살뜰히 챙긴다. 내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얼마 전 한 입원마방에서는 망아지가 먼저 풀을 다 먹으면 그제야 남은 풀을 먹는 어미말도 있었다. 설마 그럴까 싶기도 한데, 몇 번을 그러는 것을 보니 정말 양보라는 마음가짐이 말의 머릿속에 있구나라고 믿을만한 상황이었다.


엊그제 수술한 어미말은 배를 가르고 내장을 자르는 아주 큰 수술을 했고, 아직 밥도 충분히 먹을 수 없기에 젖이 충분히 나오지 않으니 망아지가 끝도 없이 젖을 물고 흔들며 자꾸만 달려든다. 제법 성가실 법도 한데 이 어미는 그냥 내주는 착한 말이었다. 게다가 망아지는 분유병의 분유 수유도 곧잘 적응을 해서 낮밤을 가리지 않는 관리자의 살뜰한 급여로 모유와 분유의 도움을 받아 나름 잘 크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나온 지 일주일 남짓밖에 안된 어린것은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서 다행히 잘 크고 있다.

따스하고 깨끗한 햇살이 가득한 5월의 아침, 패독 안에서 망아지와 엄마가 편안히 있는 모습을 한참 관찰했다. 관찰이라기보다는 그냥 말멍을 했다. 그저 구경하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면서 그 자체가 나의 큰 힐링이다. 인생 별거 없다. 나의 손이 어미말에게 도움을 줘서 태어나서 바로 고아가 되지 않고 엄마를 수술 후에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데 쓰였다는 게 그저 감사하다.


망아지는 풀밭에 벌러덩 누워서 한참을 잔다. 내가 다가와도 코까지 드르렁 골면서 쌕쌕거리며 누워있다. 한참 구경하다 보니 망아지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귀를 꿈찟 움직인다. 본인의 잠을 이어갈 것인가, 나를 의식할 것인가 머리를 든 채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시 졸기 시작한다. 가만히 나는 지켜본다. 그러다 어미말이 다른 곳으로 풀을 먹으러 걸어간다. 망아지는 그제야 엄마를 쫓아가기 위해서 펄쩍 일어난다.


이왕 일어난 거 엄마젖을 빨아보자 여러 차례 시도하는데 여전히 젖량이 많지는 않아서 열 번 넘게 시도했는데 한두 번만 목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갑자기 망아지가 이내 나한테 접근한다. 아마 사람이 분유를 주다 보니깐, 나에게 분유를 찾으러 오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는 휴대폰으로 너를 찍고만 있어서 줄 게 없다. 쓰다듬어 주기만 하니깐 다소 짜증을 내고 들이대더니 돌아간다.


햇살 속에 나도 함께 들어앉아서 한참 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만, 엄마와 망아지 둘 다 영민하고 잘 먹어서 손이 덜 갈 때가 되면, 이제 퇴원을 해야 할 시간이다. 총명하고 잘 노는 모습은 집에 돌아가서 평생 보이면 된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평온하게 둘이 패독 안에서 노니는 모습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는 5월의 어느 맑은 날이어서 다행이다.


너무 좋고 몹시 행복하다고 원하는 감정을 여과 없이 말하면 왠지 누가 시샘하고 바로 앗아갈 것 같아서 그 감정을 말이나 글로 쉬이 내뱉지는 못하겠다. 그냥 현재의 내 마음은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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