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인내
제주에는 곳곳에 벚꽃이 참 많다. 올해는 다행히 벚꽃이 만개한 시즌에 큰 비나 바람이 없어서 고맙게도 오랜 기간 흩날리는 벚꽃을 눈으로 즐기며 4월을 보냈다. 벚꽃이 유명한 장소든, 오가는 길에 핀 꽃이든, 아파트 담에 핀 꽃이든 벚꽃은 해마다 나를 놀라게 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나는 벚나무가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년 잊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는 갑자기 빵빵 갑자기 내 주변 온세상에 나타나 피어오르는 거겠지만, 사실 나는 그 길을 수백번 걸었을 것이며, 그저 지나쳐간 물체였을 뿐일 것이다.
존재감 없는 나무가 1년에 단 한계절 온 힘을 다해서 사력으로 자태를 뽐내며 이목을 집중시키면 우리는 우와 참 예쁘다 하며 사진에 남기고 간직해준다. 그렇게 잠깐의 화려한 4월의 축제 끝에 꽃잎은 순식간에 지고, 그 자리에는 부지런히 연두빛 잎새가 돋아오르고 있다.
나는 바로 지금 시즌을 가장 좋아한다. 만물이 연두빛으로 물드는 늦봄. 그리고 여름의 초입. 커다란 공연을 마치고 꺼져버린 객석을 치우고 다시 단장하는 차분한 한 명의 단원의 느낌이랄까. 그저 재단장하며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조용하고 위대한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나는 다시 숙연해지고 존경스러워진다. 한순간의 이목 집중에 기뻐하지도 않고, 오랜 기간 외면받는 차가운 시절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가질 수 없는게 인간이기에, 사람들은 자연에게 위로받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저 자연에 조금이라도 붙어있어서 물들고 싶다. 나도 자연 속의 하나의 일부가 되어 더이상 보여지는 순간의 연극에 연연하지 않고, 그러던지 말든지 그저 하루하루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조용하고 단단한 삶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것은 내가 드러나고 평가받을 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고, 내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때 잘 걸어가고 있다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다행히 이제 온 세상의 연두빛들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편안하고 또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벚꽃만큼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오며가며 보이는 작은 잎사귀와 색깔의 변화를 가득 가득 눈에 담아둬서 나를 연두색으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공상까지 이르며, 다시 오늘의 힘빠지고 피곤한 일상을 어떻게든 푸릇푸릇하게 가꿔가며 다시금 무거운 몸을 움직여 병마와 싸우는 녀석들을 살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