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울다
13번의 입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창살 없는 감옥을 폐쇄병동이라 부른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
최악의 날들이 이어진다.
병을 인지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남의 탓을 하는 사람,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랑에 울고, 상처받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혹은 자신을 너무 외면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마음의 병은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파고든다.
그러다 심각해진 후에야
가족이 강제로 입원시키는 경우가 참 많았다.
자발적이지 않기에,
원망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경우, 강제 입원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도움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내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자진해서 11번이나 입원했다.
외래 진료를 가면
제대로 진료도 보지 못한 채
바로 쓰러져 입원하는 일이 많았다.
입원장이 나오기도 전에
환자가 먼저 병실로 올라가는 경우는 드문데,
나는 1인실이라도 있으면 곧바로 입원했다.
퇴원하고 3일 만에 다시 입원했을 때
“참 힘들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힘들면 들어와야죠” 하며 웃었다.
여러 번 마주친 분들도 있었다.
회진 도는 교수님을 기다리는 시간,
나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수없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매트리스를 침대에서 빼고
두 장을 더 받아서,
회진 때도, 잘 때도
나는 바닥에서 생활했다.
떨어지면 병실 바닥에
‘꽝’ 하는 소리가 너무도 컸다.
입원 중, 나는 여러 과를 오갔다.
대부분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 때문이었다.
비뇨기과는 소변을 너무 자주 봐야 했고,
감기는 달고 살았다.
치질 수술 후 입원했는데,
심한 변비로 인해 배에 가스가 차고
대변을 보지 못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은 마치 아이를 낳는 고통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좌약을 몇 차례 넣고 나서야
통증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은,
치질 수술을 받고 한 달도 안 됐는데
진료를 보니 치질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고
아무 이상 없다는 결과를 받은 후 입원했는데,
결국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가려움증으로 피부과를 다녔고,
안구결막염으로 안과 치료도 받았다.
정신과에서 잡아내지 못한 원인을 찾고자
신경외과에서 24시간 뇌파 검사,
심층 MRI도 받았다.
하지만 거기서도 이상 소견은 없었다.
수많은 치료 속에서도
병은 점점 심각해졌다.
자고 일어나면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서,
표현하자면 롤러코스터를 탄 듯
만취 상태에서 땅이 기울고
바닥이 출렁이는 듯한 상태였다.
그 상태를 지나면서는
자다 깨어나서
6인실 병실 바닥을 온 몸으로
청소를 하며 다녔다.
알 수 없는 힘이 날 무너뜨렸다
샤워장, 화장실—
마비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남들이 감정으로 표현하던 것을
나는 몸으로 드러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쓰러졌지만
오뚜기처럼 일어나 활동하고,
책도 보고, 글도 썼다.
퇴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퇴원할 때마다
나는 알지 못하는 환자들에게도
위로의 글을 썼다.
“가장 힘들었던 환자,
가장 적극적인 환자,
모범적인 환자였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의 대가라면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텼다.
오뚜기처럼,
지치지 않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섰다.
지금도 여전히
매일 잦은 경련과 마비가 찾아오지만
나는 내일을 웃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