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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도 두 번째 수능 시험을 치던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교실 맨 왼쪽 줄 창가에 앉은 나는 창문 사이로 비치던 밝은 햇살을 그윽한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험으로 인한 긴장감은 아에 없었다. 하얀 커튼이 기분 좋은 바람에 가볍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시험을 치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어떤 시간은 우리 말로, 어떤 시간은 영어로, 어떤 시간은 일간지에 실릴만한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생 일대의 수능 시험을 치면서 나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나는 학력 고사 세대다. 그해에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점수의 학교, 그것도 야간 학과에 입학했다. 첫 수업에 나온 그 학교 출신의 교수는 빠른 선택을 종용했다. 학교 수위 조차 무시하는 그 학교를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빨리 관두라 했다. 그러나 나는 2년 동안 그 학교를 다녔다. 더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복식 부기를 배우면서 무역학과는 나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군대를 다녀온 후 소주 한 병으로 부모님을 설득했다. 반 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수능 시험을 다시 준비했다. 독시실 실장 알바로 새벽 3시까지 청소를 하며 공부를 했다. 공부법도 같았다. 그저 읽고 또 읽었을 뿐이었다.


어느 영어학원 원장 선생님을 만났다. 입시를 위한 영어 교육에 회의를 느낀 그분은 어느 날 전혀 새로운 결심을 했다. 대학 입학을 위한 공부가 아닌 즐거움과 호기심, 그리고 읽는 즐거움을 가르치는 학원으로의 변신을 결심한 것이다. 몇 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만나 공부하는 즐거움을 가르치고 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싶지만 그새 선생님이 두 분 늘었다고 한다. 감히 말하지만 나는 이 학원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수능 시험 시간에 재미있는 지문을 읽으며 행복했던 나는 공부의 즐거움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내 인생을 바꾸는 동력이 되었는지도 너무 잘 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 선생님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건 단순한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이나 불행이 아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왜 공부하는지를 모르고 입시 전쟁의 희생양이 된다. 좋은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미 탈진한, 공부에 질린 불행한 아이들만을 양산할 뿐인데. 대학 입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만 존재하는 학교에 무슨 즐거움과 행복이 있겠나. 아주 성공한 소수의 아이들을 빼고는, 그러니까 1,2등급을 빼고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런 세계에서 교사가 인정받고 사랑받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아이들은 학원에서 공부를 한다. 학교는 그 존재의 이유를 잃은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나 때의(라떼의) 교육은 무엇이 달랐을까? 그때는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목표와 권위란 것이 있었다. 매일 구타에 가까운 체벌을 받으면서도 스승에 대한 최소한 존경심과 외경심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처럼 파편화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그런 관계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내가 두 번째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 아이들은 각자의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선배는 존경받지 못하고 동아리는 와해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입학하자마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사업 고시 준비했다. 아무도 데모에 나가지 않았다. 적어도 첫 번째 대학을 다닐 때는 선배가 있었고, 동아리가 있었고, 민주화라는 공통의 대의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거짓말처럼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앞서 만난 그 학원 원장님에게 우리 아이들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기대하는 건 단 하나다. 공부의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영어로 배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나는 우리 아이가 공부를 통해 살아갈 이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 옛날 새벽 3시에 여자 화장실을 청소하면서도 불행하다 여기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의 이유를 발견한 나는 그해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그 어떤 아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1등급의 점수(수학을 제외하고는)였다. 앞서 소개한 원장님께 영어를 배운 아이 중에는 서울대를 간 친구도 있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 일이다. 감히 단언컨대 공부를 통해 즐거움을 깨달은 아이는 이 나라에서 4%가 아니라 0.4%도 되지 않을 것이다.


교사들이 불행한 시대다. 그러나 아이들도 불행하다. 학부모라고 행복하리 없다. 그러나 이유는 단순하다. 공부의 목적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공부가 즐거울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행복해질거란 환상이 아직도 통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오면 성공의 기회도 넓어진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의 검사들을 보라. 장관들을 보라. 청치인들을 보라. 철학이 부재한 영재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보라. 그러니 부디 우리 아이들에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올바른 답을 알려주자. 공부는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로 즐겁고 행복하고 보람되고 가치있는 일이다. 수단이 그 목적을 앞설 수 없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배우는 즐거움을 가르쳐주고 싶다. 내가 수능 시험을 치르던 그날 그 때의 그 충만함을 경험케 해주고 싶다. 그걸 깨닫게 된 아이에게 주어질 기회는 SKY보다 몇 배는 클 것이라 감히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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