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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찬란했던 당신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고 유기상님을 보내며...

기상님, 안녕하세요. 저 박요철입니다. 아, 아신다고요? 그렇죠. 우린 서로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죠. 그런데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요. 정기모임 뒷풀이에서 술에 취해 있던 당신이 헤어진 후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는 척 하고 있었어도 다 듣고 있었노라고.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내게 그날 제가 던졌던 질문에 대해 조목조목 답을 해주었죠. 그리고 오히려 내게 제안을 했었더랬습니다. '스몰 스텝'을 주제로 한 기업 강연을 제안해달라고. 제안서를 어떻게 만들지 난감하다고 했더니 샘플 몇 개를 보내주었죠.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후로 한 번 더 독촉 메일인지, 톡인지를 보낸 것이 우리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왔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여러 사람과 함께 말이죠.


사실 당신의 부고를 들을 때만 해도 나는 비교적 담담했습니다. 미안해요. 아버님의 주검 앞에서도, 가장 아끼는 사촌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담담했던 저입니다. 이럴 때면 태어난 곳만 서울이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의 본능?이 작동하나 봅니다. 아니면 한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했던 그대로 '냉정한 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무심히 당신의 마지막 길을 마중하러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들었죠. 얼마 전 구입한 에어팟으로 말입니다. 그때 이제는 한풀 꺽인 잔나비의 노래가 우연히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왈칵 하는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대로 대화 한 번 안해봤으면서, 나는 왜 그 노래를 듣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실감했던 것일까요? 당신도 이 노래를 한 번은 들어보았겠지요?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합니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쓱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개구장이 같은, 티없이 순수한 웃음으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미안해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매우 조심하는 저입니다만, 제게 당신은 읽기 쉬운 마음을 가진 순수한 청년으로 다가왔던게 사실입니다.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도 조금 있어 보였죠. 그래서 누군가 머물다 가길 바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사람들을 공유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오늘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당신과의 추억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E님과 H님은 당신과 걸었던 길을 가장 먼저 기억해주었습니다. 사탕을 입에 물고 저 멀리 보이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저곳에 오르겠다고 말했었다더군요. 그래서 당신은 산을 올랐던 것일까요? 고소공포증도 있는 사람이, 요 며칠 서너 시간을 자며 강행군을 했던 사람이, 사람책 강연을 위해 그렇게 준비를 많이 했던 사람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L님과 함께, 그렇게 산을 오르고 싶어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산도 모르면서, 반 팔에 반 바지를 입고, 백운대를 오르려 했던 그 무모함을, 남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가슴이 뻥 뚫리고, 막힌 마음이 쏟아져 내릴까요.


지난 목요일이었나요? 우리는 나란히 하나의 무대에 올랐습니다. 'Back to the Basic'이란 주제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20분 간 나누는 특별한 모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강연을 '사람책'이라고 불렀죠. 그 강연에서 당신은 두 번째 연사였고, 저는 마지막 연사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당신의 강연이 끝나던 순간 제 머릿속은 아찔했었습니다. 전문 강사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조리있고 힘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하는지. 엄살을 섞었지만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압권은 당신이 모으고 있다는 도자기 사진들이었죠. 당신이 따라 그린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모사한 그림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는 순간이었죠. '강한 남자'란 단톡방을 만들어가며 팔굽혀 펴기에 인생을 거는 듯한 당신의 모습은 마초의 전형처럼 보였는데 말이죠. 그 마음 한 켠에는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 한 편이 걸려 있었다니요. 그러면서 당신은 슬쩍 나를 돌아보며 '직접 사과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전했더랬습니다. 그 말을 하는 당신의 손이 가볍게 떨고 있었다고, 오늘 장례식장을 함께 찾은  E님이 말해주었습니다. 그깟 일이 무슨 대수라고. 당신의 손은 그렇게 떨고 있었던 겁니까. 그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한 것 뿐이었는데 말이죠.


우리가 함께 했던 '사람책' 강연, 오른쪽 그림을 당신이 직접 그렸다고 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기상님, 사실 저는 이런 서간문의 글을 쓰기 싫어합니다. 감정 과잉이 되기 쉬워서 그래요. 전날 밤새 썼다가, 다음 날 아침이면 찢어버리는 편지 같은, 그런 서간문 쓰기를 오랫동안 경계해왔습니다(지금도 아침에 이 글을 고쳐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상님에게는 편지를 쓰고 싶더군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그 날 강연을 마치고 가장 먼저 당신을 찾지 않았을까요? 굳이 변명하자면 '별 것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눈빛으로 사과를 주고 받았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 날 나는 당신을 찾아가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했었습니다. 굳이 개인적으로 사과할 일도 아니라고 안심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떨리는 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환하게 웃는 당신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혼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이틀의 시간이 지난 후, 당신은 황망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못다한 진심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짧았습니다. 당신은 스몰 스텝이란 이름의 모임을 두어 번 찾아왔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당신도 만났습니다. 그 시간에 당신은 부모님을 향한 100개의 감사 편지를 우리와 함께 썼고, 지난 1년을 함께 반추했으며, 당신의 생각을 전하는 강연을 '사람책'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돕고 싶어 했고, 함께 하고 싶어했으며, 우리는 그런 당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강한 남자'라는 이름의 단톡방을 만들어 짧지만 뜨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일 수십 개의 팔굽혀 펴기를 마치고, 볼록하던 배가 복근 직전의 성실한 몸으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주던 당신의 환한 얼굴을 기억합니다. 가장 믿고 따르는 형님 한 분과 함께, 당신은 일요일 아침 백운대를 올랐고, 정상 직전의 산 길 어느 곳에서 깨어날 수 없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함께 있던 L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인적도 드문 산 꼭대기 근처, 헬기가 당신의 잠든 몸을 병원으로 옮기기까지는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 나 역시 깨어 있었지만 전화로 당신이 상태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걱정됩니다. 당신과 함께 산행을 했던 그 사람은, 당신을 아끼던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많이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염려 말아요. 당신은 그토록 떨리던 그 강연을 믿을 수 없도록 잘 해내었고,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100개의 감사 인사를 남길 수 있었고, 그토록 믿고 따르던 형님과 함께, 그토록 오르고 싶어했던 산을 올랐으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당신의 웃음을 기억합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짧지만 소중한 순간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강남방'은 다시 만들어질테니 너무 염려 말아요. S코치님도 있고, L평가사님도 있고, N님도 있으니까요.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열심히 몸을 만들 분들은 다시 그들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마음과, 아이같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과, 언제나 한계와 제한을 뛰어넘으려 했던 당신의 용기를. 그러니 모쪼록 그곳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 주세요.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 속에서,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당신이 남기고 간 마지막 강연 속 이야기처럼. 기꺼이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품을 줄 아는 넓은 마음으로, 우리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가끔 불러주세요. 우리의 남은 삶으로 화답할 수 있도록. 이제는 당신의 남은 꿈을 더 이상 미루지 않아도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피고 지는 마음을 알아요. 다시 돌아온 계절도.

난 한동안 새 활짝 피었다 질래. 또 한 번 영원히.

그럼에도 내 사랑은 또 같은 꿈을 꾸고.

그럼에도 꾸던 꿈을 미루진 않을래.'



p.s. 짧은 시간 스몰 스텝의 '정기모임'으로, '디자인 2019'로, '100감사 편지'로, '독립서점 투어'로, '사람책'으로 함께 했던 고 유기상님을 기억하며 부치지 못할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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