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그를 만났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는다. 어느 날의 스몰 스텝 모임을 마치고 방향이 같아 지하철을 함께 탔다. 중학교 영어 선생님이라고 했다. 소탈하고 평범한 인상이었다. 어딜 가도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사람, 수줍은 듯 조용히 물드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중학생들을 위한 스몰 스텝 강의를 요청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이우 중학교의 교감 선생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볍게 만나는 자리로 알고 갔다가 세 분의 선생님께 둘러 싸여 면접 비슷한 것을 보았다. 즐거운 대화였지만 돌이켜보니 부담스런 자리였다. 강사 한 명을 세우는데도 이렇게 꼼꼼한 학교라니. 학교에 대한 신뢰감이 더 깊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걱정했던 강연은 성공적?이었다. 3년 째 같은 강연을 하다보니 사람들의 눈빛만 보아도 얼마나 내 얘기에 몰입해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100명이 넘어도 사람의 얼굴 하나하나가 그대로 들어온다. 그 중 한 사람만 졸고 있어도 온 신경에 거기에 쏠린다. 몰입의 공기는 다르다. 듣는 사람이 집중하면 말하는 사람은 배로 몰입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 신기하게 나는 자유로워진다. 무슨 얘기를 해도 들어줄 것 같은 믿음 때문이다. 중학생들이 그렇게 반응해줄 줄은 몰랐다. 이들을 만나기 전, 짧은 강연 인생의 마지막이 왔다라는 자조 섞인 웃음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과 용기로 충만한 경험을 선물해준 이가 바로 위에서 얘기한 선생님, 이우 중학교의 교감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가 인생의 첫 글이라며 블로그에 올린 글을 '황홀한 글감옥'에서 읽었다. 맨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글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학교의 교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푸름과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공간이었다. 사진만 보아도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감쌀 것만 같다. 글을 읽었다. '몸'이라는 키워드로 풀어지는 그의 글은 사진 속 교실의 전경과 닮아 있었다. 말과 생각이 아닌, 그의 손 끝에서 시작된 경험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술술 풀리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에 내가 만난 어느 한정식집 사장님은 몸을 쓰고 사람을 만나기 보다 액셀 속 숫자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정 반대였다. 추상적인 단어와 사고의 영역이 아닌,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는 '행동'과 '실천'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생각하기 보다 움직이는 사람, 몸을 쓰면서 살아나는 사람, 그 결과가 교실 속 싱싱한 화초들로 그대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움직일 때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주머니 속 송곳처럼 그 사람의 자기다움이 삐쳐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헤어 스타일이건, 옷차림이건, 좋아하는 물건이건, 글이건 반드시 표현되게 마련이다. 나는 그러한 자기다움의 흔적을 찾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다. 그 사람이 즐겨 찍는 사진 속에도 흔적은 있다. 즐겨 보는 영화와 드라마, 대화 속 키워드에서도 자기다움은 드러난다. 유독 키보드와 노트와 펜의 촉감을 즐기는 사람을 주목한다.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이 중학교 선생님은 이미 자기다움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스몰 스텝에 빠져 이 방 저 방을 전전하던 그가 이제는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끈기 없음을 탓했지만, 나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 분의 삶이 정말 흥미로웠다. 인생의 곳곳에 끊임없이 물을 줘야 하는 열심이 그에겐 전혀 고단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에서는 인싸였던 그가 왜 지금의 학교에서는 아스팔틀에 갈아대는 듯한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을까. 그건 이우 중학교가 추상적인 가치와 신념으로 가득한 학교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는 무엇이든 몸으로 부딪혀야 살아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학교 외의 다양한 관심사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일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종의 '통역가'일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언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번역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알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말로 만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이 몇 배는 쉽기 때문이다. 내가 스몰 스텝을 시작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손으로 안개를 잡는 듯한 '자기다움'이란 단어를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글은 뜻밖에 살아 있는 생명체다.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의미를 남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다움을 찾기 위해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자신에게 꼭 어울리는 키워드를 찾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자기다움을 글로 표현하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 오늘 소개한 선생님에게는 그것이 '몸'이라는 키워드였다. 이 단어를 찾은 순간 선생님에겐 할 말이, 쓸 글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렇게 구체적인 글이 좋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몸을 움직인 글은 생생하기 때문이다. '용기'를 글로 쓰는 것과 다이빙 대 앞에 선 사람을 묘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명확하면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 있다. 나는 그런 삶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활자와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설혹 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행동으로 표현하고 결과로 만들어내는 삶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한 이 선생님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계신 분이었다. 마치 교실 곳곳에서 그 푸름을 자랑하며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화초들 처럼 말이다.
p.s. 그러고보니 이 선생님의 아이디는 '푸른 보리'였다.
* 푸른 보리 선생님을 더 알고 싶으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