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는 선물
오늘 날씨는 어제처럼 따스했다. 햇살이 커다란 창을 뚫고 긴 탁자 위로 내리쬐었다. 창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크게 심호흡하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내 몸 구석구석까지 공급되는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계수나무 노란 잎은 거의 떨어져 생생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화살나무는 불그스레 물들었다. 그 아래 잔디밭 색도 바래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가을이 깊어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시간은 매끄럽게 흘러갔다.
나의 하루는 길다. 낮 8시간이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선물처럼 툭 던져진 시간은 나를 느긋하게 만들었고, 아침의 시작은 충분히 여유로워졌다.
가끔은 일어나 시계를 보고는 '이 시간이면 사무실 회의 탁자에 앉아 업무 관련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회사에 다니던 습관을 아주 잊은 건 아닌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느리게 아침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좋았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쇼팽 연주를 들으며 샐러드와 빵, 그리고 차로 시작하는 아침. 시간이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과 마주 앉아 식사하는 동안 특별히 할 말은 없다. 소소한 일상을 주고받지만, 절실한 대화는 아니다. 그저 의식적으로 나누는 몇 마디뿐. 그마저도 상대가 불필요한 지적을 하면 굳이 말을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해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함께 아침을 먹는다는 것, 이 평범한 시간을 30년 넘게 나눈다는 것은 김훈 작가의 “말로 소통하는 단계를 넘어섰거나, 아니면 소통되어야 할 의사가 이미 다 소통되어 버린 것 같았다.”라는 표현과 같았다.
바깥을 보자 하늘이 푸르고 높았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운동화 끈을 묶고 현관문을 열었다. 며칠 전과 다르게 선명한 햇빛 때문에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 나름의 아침 의식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골목 양옆에는 은행나무가 길게 줄지어 서 있고, 바닥에는 떨어진 은행잎이 노란 양탄자처럼 깔려 푹신하다. 그렇게 동네를 빠져나와 숲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빽빽한 나무들이 서 있는 숲이 눈앞에 펼쳐진다. 매일 거의 같은 시간, 같은 길을 걸어도 그 풍경은 매일 다르고 늘 새롭다.
어떤 날은 걷다 보면 정장을 차려입고 숲속을 걷는 사람을 마주치곤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예전에 내가 회사에 다닐 때 점심을 서둘러 먹고 회사 뒤편 도솔산을 오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을 쪼개어 잠깐이라도 숲으로 향해야 비로소 가슴이 시원해졌다. 그 짧은 시간이 하루 중 내게는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또 가끔은 내 기억 속에 방치되어 있던 생각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다. 대부분은 별 의미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가끔은 묵직한 질문이 찾아온다. 앞으로 120세까지 산다는데 그렇게 오래 살면 어쩌나 하는 염려. 당장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불안. 한 달이 마치 하루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라곤 했다.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시간 중에 행복했던 절정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그런 시간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런 시간이 다시 오게 될는지.
걷는다는 건 그런 것인가 보다. 멈춰 있던 생각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굳어 있던 가슴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 아무도 없는 숲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이 스며드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하는 일이었다.
수많은 생각을 마주하며 시간이 흘러가도, 결국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서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무리 눈앞에 또렷이 떠오른다 해도, 그것은 이미 사라져 잡히지 않는 허상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나를 지탱하는 힘은 ‘지금’에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아차린 뒤, 나는 터벅터벅 흙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마당의 계수나무를 다시 본다. 노란 잎이 또 몇 장 떨어져 있다. 그렇게 나무는 시간을 보내고, 나도 시간을 보낸다. 급하지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8시간이라는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나는 오늘도 시간과 함께 걷는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운동화 끈을 묶고 길을 나설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