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7시가 다 되어 간다. 이번에는 기필코 백록담에 오르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진 기분이다. 재빨리 짐을 챙겨 호텔을 빠져나왔다. 주차해 둔 곳이 조금 떨어져 있어, 이른 아침 제주 거리를 잠시 걸어 본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내비게이션에 성판악주차장을 찍었다. 출발하길 30분. 이런, 주차장이 벌써 만차다. 안내에 따라 조금 전 지나온 제주국제대학교에 주차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와야 한단다. 나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다시 제주시내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한참을 내려오고 나서야 제주방목지가 보였다. 여기다 주차하고 버스를 타고 가면 될 것 같았다.
한라산에 처음 올랐을 때는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낀 주말 하루 연차를 내고 아내와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 애월 바닷가에 숙소를 잡고 아침 일찍 출발해 어리목코스를 함께 올랐다. 등산로는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리석게도 사진을 찍어 보겠다고 DSLR 카메라를 목에 건 상태였다. 등산이 서툴렀던 우리는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겨우 윗세오름까지 올라 발아래 구름을 두고 컵라면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그때까지만 해도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팔았다). 하늘 빼고 모든 것이 하얗다. 구름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영하의 날씨에 얼었던 손발이며,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까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랄까.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정상까지 꼭 올라보고 싶었다. 그게 겨울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때가 벌써 15년 전이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바라본 눈 덮인 한라산이 나를 압도했던 기억, 줄곧 가슴속에 선명한 사진처럼 갖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15년간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 겨울에만 서너 차례 시도했으나, 날씨 때문에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한 번은 사라오름, 한 번은 어승생악, 한 번은 제주도까지 왔지만 폭설로 등산 자체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었다.
초여름의 한라산은 평일이어도 붐볐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곧장 등산로 입구로 향한다. 그 사이 한라산은 등반 신청을 해야 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국립공원에서 보내온 문자로 체크인을 하고 등산로 입구에 들어선다. 등산로 바닥에 깔린 야자수 매트가 어제 내린 비를 흠뻑 머금고 있다. 걸을 때마다 질척거린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약 10킬로미터, 왕복으로 치면 족히 20킬로미터, 시간상으로 쳐도 왕복 7시간은 될 것 같았다. 가보자. 과연 체력이 버텨 줄지는 모르지만.
얼마 전이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속이 텅 빈 듯한 허탈감이 찾아왔다. 일부러 웃어도 보고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식사자리와 술자리에도 오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미 없었다. 어깨와 목의 통증은 잠시도 앉아 있게 놔두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앉아 있으면 발끝부터 목까지 뻐근하고 시린 통증이 찾아왔다. 잠깐 이러다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통증이 짙어지고 나는 그것이 그동안 쌓인 응어리이자 울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먹어도 매스껍고, 입 안이 헐어 입천장 껍질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내 심연의 그 무엇과 마주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걷기 시작했다. 날마다 걸었다. 그리고 난 지금 제주도 한라산에 오르고 있다.
제주도 6월은 이미 여름이다. 어느덧 땀이 나기 시작한다.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 가방에 묶는다. 무성한 숲 사이로 가끔씩 햇살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민다. 산책하듯 걷다 보면 속밭대피소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그래서 가끔 한라산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등산은 이제부터다. 물 한 모금 마신 후 발길을 재촉한다. 진달래밭까지 가려면 까마득하다.
잘 따라와 주던 다리가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에 천근 만근이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보다 길이 거칠다. 전날 비까지 와서 미끄럽기까지 하다. 15년간 밀린 숙제를 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까?
산에 오르는 것은 나를 단순화한다. 오르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게 된다. 아니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 털어버리고 나면 진짜 감정만 남는다. 나는 그것과 마주하고 싶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나무들이 내 키보다 작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니 까마귀들이 먼저 반긴다. 그늘을 찾아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앉은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다. 바쁘게 오르다 보니 미쳐 도시락을 챙기지 못한 나는 어제 사놓은 초코바를 꺼내 먹으며 산꼭대기를 올려다본다. 아직도 한두 시간은 더 가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지친다, 아니 오르는 것이 지겹다. 더 못 오를 것 같다. 그래도 가야 한다. 지금까지 오른 것이 아까워서라도 가야 한다. 사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어서, 살아온 것이 있어서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삶에는 관성이 있다. 어느 한순간에 무 자르듯이 멈출 수 없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함께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관성은 더 강하고 오래간다.
늦가을을 생각나게 할 만큼 찬 바람이 막바지 계단에 오르자 사방에서 불어 제친다. 그늘도 없는 언덕을 거의 젖 먹던 힘까지 내가며 한 걸음씩 오른다.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15년간 하지 못했던 숙제를 이번에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정상에는 표지석 앞으로 줄이 길다.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최소 30분은 걸릴 것 같다. 요즘 한라산 등반 인증서 받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들었다. 가끔 여행 가는지, 사진 찍으러 가는지 모를 정도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제대로 파고든 것 같다.
정상에 올라서 백록담과 마주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름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낭패다 싶어 등을 지고 사라오름을 바라보고 있는 찰나,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환호를 지른다. 등을 돌려보니 신기하게도 오리무중이었던 백록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잠깐의 시간에 구름이 모두 걷혔다. 스마트폰을 꺼내 연신 사진을 찍는다. 언제 또 구름에 가려질지 모를 일이다.
한라산은 엄마의 품 같았다. 모질고 거친 산길을 오르듯 지치고 힘들었을 인생살이에 자식들이 고향에 내려와 마주한 주름살 많은 엄마 말이다.
한라산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숙제를 완수한 나는 인증 사진을 아내에게 보냈다. 아내 또한 흐뭇해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전화를 걸었더니, 숙소 잡아줄 테니 며칠 더 있다 오란다. 다시 묻지 않았다. 그냥 '알았다'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아내가 보내준 숙소 주소로 차를 몰았다.
- 안녕! 제주 세 번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