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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아빠, 30대 아들의 페로제도 여행 21밤 4

8/11 흐림, 안개, 비

by 페로 제도 연구소
4일 차 동선
체크아웃 > [뷰포인트] 츄누비크(Tjørnuvík) > [트레킹] 클루프타포수르 폭포(Kluftáfossur) > 점심(Rose's Restaurant & Catering) > [뷰포인트] 리신&켈링인(Risin og kellingin viewpoint) > [숙소] 괵브/교그브(Gjó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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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기막히게 새벽 간 맑았던 토르스하운에 안개가 끼고 비가 온다. 이제는 약간 체념 상태다. 앞으로의 일기 예보도 좋지 않다. 이때 날짜를 잡은 건 날씨가 괜찮을 거라는 예보 때문이었는데, 헛된 희망이었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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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 4일간의 토르스하운 일정을 마치고, 어제 들렀던 괵브/교고브(Gjógv)로 이동하는 날이다. 밖을 보니 오늘의 날씨는 역시 '페로'다. 아침에 일어나 아빠랑 어제 남긴 초밥을 나눠먹었는데, 아빠는 초밥 퀄리티가 좋다고 했다. 나가기 전, 오늘 하루를 위한 커피를 내려 마셨다. 나는 커피머신 쓰기를 정말 어려워한다. 버튼이 하나밖에 없는데 왜 그게 어렵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일단 커피 캡슐을 넣는 방법이 기기마다 다 달라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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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특이한 것을 봤는데, '닫힘' 버튼이 없었다. 딱히 페로라서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잠시 닫힘 버튼 없는 한국의 삶을 상상해 본다. 뭐, 막상 없으면 또 그럭저럭 살만한 것 같은데? 단, 노약자 전용이라 늦게 닫히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닫히는 속도만 아니라면...


체크아웃을 하기 전, 오늘 같은 날씨에는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옅은 비가 올 예정이고, 비구름이 갤 기미는 안 보이지만 그렇다고 걷는데 큰 지장이 있는 날씨는 아니다. 그렇게 최대한 풍광이 덜하지만, 가기로 리스트업 한 곳 중 몇 군데를 엮어 하루의 코스를 만들었다. 우선, 간단한 트레킹도 할 수 있는 클루프타포수르 폭포(Kluftáfossur)로 향했다. 가는 길에 노래를 들으려고 유튜브 프리미엄을 결제했는데, 막상 무슨 노래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지? 잘 모르겠다. 아빠한테 신청곡을 물어봤는데,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해서 80년대 팝송 히트곡 모음집을 검색해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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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작은 폭포가 하나 있다. 나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아빠는 여전히 이 정도면 좋다고 했다. 아빠는 폭포에서 내리는 흰 물줄기가 아빠의 흰 머리카락을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아재 개그란... 그런데 사진에서 본 폭포랑 다른데? 트레킹 코스는 또 어딨지? 처음엔 내가 잘못 안 줄 알고, 일단 거기서 사진을 찍고 해변이 있는 그다음 목적지인 츄누비크(Tjørnuvík)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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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안갯속에 감춰진 모습이 더 압도적으로 느껴져 쥬라기공원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이런 뷰면 안개가 껴도 인정이지. 오히려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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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와 주변을 둘러봤는데,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길래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줄 알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한 가족이 쑥 들어가길래, 눈치 좀 보다가 따라 걸어 들어갔다. 끝까지 걸어가니 항구 같은 게 나왔고, 나오리라 예상했던 트레킹 코스는 따로 없었다. 안개가 무겁게 내려 주변 지형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돌아오며 마을을 둘러싼 산과 그 산을 덮은 안개를 보니 마음의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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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 동네의 분위기가 좋다면서, 다들 집을 어떻게 지었는지 한 바퀴를 둘러보겠다고 한다. 부자 관계지만 이렇게 관심사가 다르다니. 식당도 없이 간단한 카페만 있는 도시라 다시 되돌아가기로 했다. 페로에는 이런 신호등이 있는데, 편도 1차선 도로에 양쪽으로 차가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신호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5분. 다행히도 여기 신호등엔 타이머가 장착되어 있는데, 다른 곳은 없는 곳도 많고 15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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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 아까 그 폭포가 있던 곳을 지나는 중,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어딘가 트레킹 코스가 있을 것 같아 다시 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구석구석 뒤지다 보니, 트레킹 코스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줍게 숨어있는 한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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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쭉 따라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풍경을 즐기던 차, 입구라고 하긴 너무 중턱에 있지만 여하튼 문이 열리니 입구라고 부를 그것이 나타났다. 아빠가 문을 열려고 해 보다가 그만 문을 바닥에 빠뜨려버렸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한데, 진짜 빠뜨렸다. 하여튼, 뭐 좀 안 되는 것 같으면 항상 힘으로 뭘 해보려고 한다. 문을 다시 잘 끼워놓고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폭포물로 세수를 하면서 시원하다고, 개운한 표정을 짓길래 내가 화를 냈다. 거기에 양 오줌이라도 흘러 내려왔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나도 19년에 아이슬란드의 스코가포스에서 물을 텀블러에 담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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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끝에 도착하자 주상절리 지형과 폭포가 나온다. 내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폭포 중 하나가 스바르티포스(Svartifoss)인데, 그 느낌이 나서 작은 폭포지만 꽤 멋지게 느껴졌다. 누군가 여기서 수영을 했었는지, 수영 금지 표지판이 있다. 생각보다 물이 깊은가 보다. 오늘 날씨는 여전히 안 좋았지만 올라올 때 굉장히 기쁘게 올라왔는데, 양 배설물이 없고 군데군데 신발을 씻을 웅덩이 같은 게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시 진흙에 뒹굴 신발이지만, 신발을 깨끗이 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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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턴 'Rose's Restaurant & Catering'이라는 식당 얘기를 할 건데, 지금 갈 식당은 작년에 아내와 함께 가본 곳이다. 그때 예약을 안 하고 오픈 시간에 맞춰 갔는데, 요리 겸 주문을 받는 여자가 예약을 안 했다고 엄청 눈치를 주면서 말 그대로 고깝게 굴더니 자기 손은 두 개라 주문한 요리를 다 못 할 수도 있다는 둥... (4시까지 그 식당에 손님은 우리를 포함해 3팀이었다.) 구글맵 리뷰를 보면, 이 여자가 얼마나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먹으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 주변에 대체할 만한 식당이 없어 그냥 식사를 했던 곳이다. 음식 맛은 좀 짜긴 했지만, 페로 식당이 전반적으로 짠 걸 생각하면 꽤 맛있는 요리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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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번엔 예약하는 걸 까먹었다. 구글맵 리뷰에 예약이 필수라 쓰여있지도 않고, 작년의 일을 내가 기억할 필욘 없다. 식당 주인이 안 받으면 그만이니까. 이번에도 오픈 시간에 맞추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의 그 여자가 앞에 서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들어가서 두리번거리는데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카운터에 서서 우리를 지켜봤다. 그제야 나는 카운터 앞에 종이에 쓰여있던 'Please wait to be seated'를 봤고, 그녀 앞으로 갔다. 그런데 진작 말해주면 될 걸, 그걸 끝까지 보고 있다가 꼽 한번 주려고. 솔직히,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없다고 생각했다. 친절은 바라지 않지만 무례하게는 안 해야지. 그때부터 기분이 진짜 안 좋았는데, '자신들은 예약 위주로 운영되는 식당이고, 예약이 없는 사람은 메뉴에 있는 거 다 먹을 순 없다.' 이런 소리를 하길래 알겠다고 하고 메뉴를 주문했는데 주문한 대로 다 나왔다. (그리고 그날 그 시간대 식당엔 우리를 포함해 두 팀이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내가 햄버거가 맛있다고 했더니, 아빠는 햄버거도 시키자고 했다. 나는 작년에 아내가 먹었던 '오늘의 생선'을, 아빠는 연어 파스타를 시켰다. 그렇게 40분이 지나고 나서야 음식을 받았고(심지어 우리보다 15분 늦게 온 팀이랑 음식이 같이 나왔는데, 두 테이블 다 같은 메뉴를 시켰다.), 식당 주인의 그 스탠스를 아빠도 느꼈는지, 평소에 말하길 좋아하는 아빠도 적막 속에 핸드폰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 사람이 만든 분위기에 아빠와 나의 시간도 그렇게 된 것 같아 기분이 매우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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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가 나왔는데 면이 골뱅이같이 생긴 면이 나와 당황했다. 아빠는 처음에 보고 파스타가 아닌 줄 알았다고 했다. 연어 스테이크는 껍질이 정말 짰고, 내 오늘의 생선은 소스가 짰지만 대구는 쫄깃쫄깃해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페로 음식이 전반적으로 짠 편이라 어쩔 수 없지. 햄버거는 역시 맛있었고, 알감자도 고소하기도 했지만 싱거워서 짠 음식과 곁들여 먹기 좋았다. 여하튼, 690 DKK, 약 14만 원을 음식값으로 지불하면서 마음속으로 리뷰에 뭐라고 쓸지 수십 번 되뇌며 식당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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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까지 시간이 좀 남아 리신&켈링인(Risin og kellingin) 뷰 포인트를 지나 숙소에 체크인하기로 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페로에서의 운전은 언제나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으레 저런 돌이 그렇듯, 저기도 얽힌 전설이 있다. '아이슬란드의 거인이 페로를 훔쳐오려고 절벽 위에 밧줄을 걸고 당겼으나, 절벽에 깊은 균열이 생겨 올라가지 못하고 새벽이 와 햇볕을 피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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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뷰를 둘러보고,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데 차가 예상보다 너무 많아 당황스러웠다. 뭐지? 교그브가 아무리 인기 스팟이긴 해도, 절대 이 만큼 차가 오고 갈 정도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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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차와 사람이 많아지더니, 급기야 이거 지나가도 되는 길인지 수준으로 사람들이 길을 막고 서있었다. 나중에 숙소에 물어보니, 1년에 한 번 열리는 교회 행사가 오늘 있다고 했다. 페로에 이만큼 사람이 모인 걸 처음 봐서 신기했다. 차가 앞으로 가는데도 사람들이 길을 안 비켜줘서 창문 열고 지나갈 수 있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주섬주섬 길을 비켜준다. 경적은 울리면 안 될 것 같았어. 참고로, 내가 페로에 3주 간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는 '경적'소리다. 어느 순간 문득 내가 그 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 처음엔 좀 적응이 안 됐다. 한국에선 그 소리가 집에 있어도 들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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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체크인할 숙소는 작년에 아내와 별채를 예약해 묵었던 숙소다. 그때 뷰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 뷰를 다시 기대하고 방을 예약했다. 가능하면 그 방으로 다시 줄 수 있냐는 예약 요청 메시지도 숙소에 보냈는데,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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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아쉬움보다 더 큰 당황스러움이 날 반겼는데, 사전에 몰랐던 별채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심지어 차로 2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라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별로였는데, 가보니 방 컨디션은 더 좋아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일단, 화장실이 깨끗하다. 작년에 묵은 별채에는 화장실 커튼에 곰팡이가 쳐져 있었는데. 무엇보다, 아빠는 내가 처음에 묵고 싶었던 장소라고 소개했던 그 별채에 묵었으면 숙박시설에 묵는 느낌이 안 났을 거라고 한다. 근데 맞는 말이긴 하다. 그 별채는 너무 바닥이 보도블록 같고 화장실도 간이로 설치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


또, 각다귀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각다귀 움짤을 올릴 순 없지. 각다귀를 검색해 보니 흡혈도 안 하고 꽃가루도 옮겨서 익충이며 사방이 막혀있으면 스트레스로 일찍 죽어버리는 개복치 같은 체력을 지녔지만, 모기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보이는 족족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곤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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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선선해 아빠와 믹스커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이런 날씨와 풍광에서 믹스커피라니. (무슨 얘기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못 적음) 커피를 다 마시고 TV에 넷플릭스가 로그인돼 있길래 '여기 서비스 좋은데?' 하면서 아빠에게 넷플릭스를 틀어주고, 나는 아내가 생각나서 밖에 나가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자던 중에도 전화를 기쁘게 받아줬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월요일 새벽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오랜만에 밀긴 일기도 쓸 겸 찬 바람을 맞고 싶어서 아이패드랑 짐벌을 챙겨 일기를 쓰러 벤치로 갔다. 아빠는 바람을 맞으면 피곤하다고, 눈을 좀 붙여야겠다고 했다. 아빠=찬 바람, 피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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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로 움직이는 구름은 언제 봐도 신기하다. 타임랩스를 켜놓고 자리를 잡아 일기를 쓰는데,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이너피스'가 필요하다길래, 페로의 풍경 사진을 보내줬다. 그 친구는 그게 고마웠는지 일기에 내 얘기를 썼다고 했다. 누군가의 하루에 도움이 됐다니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페로에서의 네 번째 밤이 진다.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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