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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Mar 20. 2018

날 것 그대로의 거식증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TV를 틀면 요리를 하거나 먹거나, 배우거나, 대결하거나, 판매하는 프로그램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보여준다. 인터넷 방송에서도 각종 콘셉트의 먹방이 넘쳐나고 친구들의 SNS나 페이스북에는 한국을 넘어 세계 각지의 음식 사진과 리뷰가 가득하다. 한때는 연애 프로그램, 여행 프로그램, 육아 프로그램들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어딜 봐도 먹는 것, 음식이 주인공이다.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만 타면 상가 내 마트에 갈 수 있고  24시 편의점이 한 블록에도 몇 개씩 들어서 있다. 세계에서 최고라며 자부심을 느끼는 배달 서비스는 나날이 발전해 랍스터나 파스타, 아이스크림까지 어디서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길거리에도 한 집 건너 한 집이 음식점들이라 의도하지 않은 먹자골목들이 즐비하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음식을 소비할 수 있는 한국.

 주변 지인들에게 요즘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 물어보면 대개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월급 기다리는 재미, 야식으로 먹는 치맥, 퇴근 후 기울이는 술 한잔. 긴 줄을 기다린 후 먹는 맛집에서의 한 끼. 그야말로 먹는 것이 낙인 시대이다.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음식만이 가장 큰 사치이자 낙인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식욕을 자극하는 수많은 매체들과는 상반되게도 여전히 무대 위의 아이돌과 스크린 속 배우들은 젓가락처럼 빼빼 말라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맛집 리뷰와 먹방과 동시에, 연예인들의 다이어트 전후 사진과 아이돌 식단은 늘 화젯거리며 하루 5분에서 10분이면 가능하다는 운동 동영상들이 높은 조 횟수를 기록한다. 인터넷 쇼핑몰과 로드샵에선 작은 치수의 옷이 프리사이즈로 판매된다. 배달된 옷들을 보며 '이걸 다들 입고 다닌단 말인가? 대체 누가 이걸 입을 수 있지? 다들 알게 모르게 환불하는 거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몸에 맞지 않으면 평균에 속하지 못하는 몸매라고 수치감을 안겨주던 프리사이즈. 


 얼마 전에 참석했던 모임에서 '여자의 내숭'이 주제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몇몇의 남자들이 식사자리에서 열심히 먹기보다는 예쁘게 먹으며 소식하는 여자의 행동을 내숭이라 칭하며 서로 공감했다. 순간 울컥한 나는 그게 어느 시대 이야기냐며 언성을 높였다. 요즘 여자들은 맛있게 많이 먹는 걸 연기하고 뒤에서 토를 하거나 몇 시간씩 고된 운동을 하거나, 그 한 끼를 위해 며칠을 굶는다고. 이성을 앞에 두고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척 연기하는 것이 내숭인 시대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내 다른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스럽게 잘 먹는데 살찌지 않는 몸. 그 불가능한 일이 당연한 가치로 추앙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서대 간호학과 차보경 교수의 2017년 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의 20대 여성 10명 중 한 명이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고 한다. 대대적인 연구 결과를 운운하지 않아도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들, 의심되는 사람들이 왕왕 보인다. 살찌는 게 두려우나 식욕을 어쩌지 못해 술만 마시는 여자, 탄수화물과 양념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 사람, 영양결핍이 심해 기미가 얼굴을 덮고 탈모에 시달리는 여자, 전 날 마신 술로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눈 뜨자마자 스쿼트를 하는 친구, 밥과 간식의 경계가 없어져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먹을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 백만 원짜리 PT를 끊어서 살을 10킬로 뺀 후 다시 5킬로 찌우고 또 5킬로를 뺀 뒤 다시 10킬로를 찌우기를 반복하는 사람, 모든 음식의 칼로리를 줄줄이 외우는 사람, 잦은 구토로 손 등에 굳은살이 배기고 만성 식도염을 앓는 사람.

 섭식장애는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요즘엔 섭식장애를 앓는 남성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섭식장애가 얼마나 흔해졌는지 마른 내 몸을 보고 대놓고 "혹시, 먹고 토하고 그래요?"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다. 더 이상 연예인들의 섭식장애 커밍아웃이나 거식증이 의심된다는 가십들이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섭식장애가 현대 사회에 만연하며 섭식장애를 가진 사람의 주변인이나, 만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까지 더한다면 이제 섭식장애는 환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먹는 것이 낙인 시대를 살면서 그조차도 맘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 각종 요리 프로그램과 넘쳐나는 푸드 광고 속에서 식욕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 음식을 열망하지만 음식이 두려운 사람들. 끈질기게 쫒아오는 불안. 혹은 공허함. 끝에는 엄청난 무게의 자괴감과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과 지인들.


 나는 섭식장애를 9년 정도 앓고 있다. 물론 그 외에도 물 귀신같은 여러 정신질환을 동반하고 있다. 섭식장애 관련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이유로 글을 쓰게 된 작가의 사연들이 나온다. 나는 섭식장애를 이겨낸 것도 아니고 의사처럼 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섭식장애(거식증) 전문가다. 내가 십 년 가까이 이 장애를 앓으면서 느끼고 겪었던 일들, 환자가 생각하고 고통받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것이다. 환자 입장 전문가.

 내 글의 목적은 고해성사에 가까운 고백으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실패한다 해도 의미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내 글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글이다.  어떤 이에게는 공감이 될 것이고 위로도 될 것이다. 때때로 내 글이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면 지켜봐 주길 바란다. 응원까지 바라지 않아도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섭식장애에 대해서 오해 없이 알리는 것이다. 9년 동안 이 병을 숨기고 변명하고 거짓말하느라 나는 너무 지쳤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섭식장애가 있는 사람이건 섭식 장애자를 곁에 둔 사람이건 혹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건 적나라한 섭식장애의 세계를 알게 될 것이다. 날 것 그대로의 섭식장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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