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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Mar 29. 2018

3화  거식증, 왜 때문이죠? - (1)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거식증이 발병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크게 생물학적 원인과 사회문화적 원인으로 보지만 유전이나 생물학적 원인이 뚜렷이 밝혀진 것은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도 그렇다. 신경증에 더 취약한 성향을 타고난 사람이 양육환경이나 가족들의 가치관, 날씬함을 추구하는 시대의 흐름 등과 맞물렸을 때 발병되는 비중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소인이나 유전적 소인보다는 심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원인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만난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의 사연은 가지각색이지만 확실한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3화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몇몇의 사례와 내 개인적인 이유들에 대해 고백하고자 한다.


 먼저 사회문화적인 이유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앞선 글에서 계속 언급해온 것처럼 실제 음식 소비와 평균 체중은 증가하는데 비해 사회에서 요구되는 이상적인 신체상은 점점 말라 가는 것이 사실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은 거식증 발병률을 보이는 것도 이런 사회분위기가 큰 이유임을 뒷받침해준다. 외모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큰 기대치를 부여받는데 비해 남성의 뱃살에는 관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심리적인 이유로는 외적 가치가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양육환경이었거나 외모로 인한 따돌림의 기억, 성에 관련된 트라우마, 엄마와의 뿌리 깊은 갈등, 완벽주의 부모의 강한 통제 속에 자란 아이, 성장과 성숙에 대한 거부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내가 만나고 경험해본 섭식장애인들 역시 외모지상주의에 분노하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 역시 그렇다. 섭식장애가 있으면 '살찌는 것'을 엄청난 죄이자 실패로 본다. 본인의 체중에도 민감하지만 타인의 '살'에도 부정적인 시선을 갖는다.(언제나 예외는 존재한다.) 내가 듣고 겪은 기억에 남는 말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자를 먹으며 걸어가는 여자를 보며 "저렇게 먹어되니 살이 찌지, 길거리에서 저렇게 먹고 싶을까."

"더러운 비계 덩어리들이 두 발로 걸어가네."

"돼지 같은 것들한테서 나는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혀."

"보고 싶지 않은 뚱뚱한 년의 속옷을 봐버렸어. 바지를 입고 다닐 것이지. 내 눈이 썩을 것 같아."

"요즘 연예인 00봤어? 살 찐 것 같더라. 00는 원래 좀 뼈가 굵은 타입이지."

"너 뱃살 있네?"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날씬함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싫으면서도 자신은 열심히 그 틀에 구겨 넣고 그로 인한 막대한 스트레스와 불만, 분노들이 그대로 남들에게 표출되는 모습이다. 주로 심한 저체중은 아니지만 살에 대한 강박을 지닌 사람들이 이런 비난을 쏟아낸다. 고도의 저체중이거나 만성화된 거식증 환자들은 더 이상 저런 분노를 표출할 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2화에서 언급한 적 있는 A는 엄마와의 갈등이 깊었다. A의 부모는 이혼한 지 오래였고 어머니는 새로운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A의 어머니는 젊고 아름다웠다. 언제나 손질된 머리에 잘 다려진 옷과 적당한 높이의 구두를 신고 계셨다. 그녀는 커리어우먼이면서 사회적으로 그 성품까지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A였다. 그녀가 만나는 남자와 갈등이 생기거나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 때 그 모든 화살은 A에게 돌아갔다. A는 거식증 말고도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고 자해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정신병이 가득한' 존재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 완벽에 가까운 자신에게 유일한 흠이자 약점이 A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겐 오아시스처럼 작용했다. 쉽게 설명하자면 변명거리가 생기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간적인 실수나 어리석음, 혹은 쉬고 싶은 순간에 그녀는 A를 이용했다. 그녀는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애인에게 달려가 A의 상태를 읊으며 울었고, 다른 지인들 앞에서도 A를 이유로 동정받기 일쑤였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슬픔이 A로 인한 것인 듯 피해자가 되셨다. 그러나 그녀의 이혼과 삶의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자는 어쩌면 A가 아닐까? 애초에 A는 어떤 이유로 그리 아파하게 된 걸까? A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며 서 있을 곳을 만들기 위해 '환자 역할'을 맡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겉으로 인정하거나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혹은 자각조차 못한다 해도 어느 순간부터 그 가족에게 거식증은 '필요한 것'이 돼버렸다. A의 근본적인 거식증 발병원인이 무엇이었든 이제는 낫고 싶어도 나으면 안 되는, 가족의 필수요소가 돼버린 것이다. 




 취미 모임에 나가서 알게 된 E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이는 올해로 23살이지만 그녀의 몸은 미쳐 다 성장하지 않은 십 대의 몸 같았다. 얼굴이나 몸, 순수한 마음까지도 어린아이를 닮아 여자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E였다.

 E는 10살에 처음 아버지 얼굴을 알게 됐을 정도로 안정적인 양육환경에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혼은 뒤늦게 하셨지만 별거 중인 엄마와 둘이 살아왔고 그 사이사이 엄마의 새로운 애인들이 동거하곤 했다. 당연하다는 말이 우습지만 당연히 E와 엄마, 그리고 동거남과의 관계에 갈등과 어려움은 많았다. 

 E 역시 심한 저체중으로 2~3시간 동안 차려진 밥의 3분의 1 정도를 깨작거리며 먹곤 했다. 그게 E의 하루 총식사량이었다. E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해 툭하면 외박을 했고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거부했다. 뼈 밖에 없는 몸, 거르는 끼니들, 젊은 아가씨의 잦은 외박. 이 모든 것들이 E를 아끼는 이들에게는 화가 날 만큼 걱정스러운 일들이었다. 특히나 E의 엄마에겐 더 그러했을 것이다. E는 수동 공격적으로 엄마를 미워했다. 자기에게 소중한 엄마를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었던 E는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방법으로 엄마를 공격해온 것이다. 밥을 거부함으로써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당신 때문에 자신이 이토록 외롭고 고통스럽다고 소리 없이 외쳐왔던 것이다. 마르고 병약해지자 자기 나이에 요구되는 사회적 과제들을 면피할 수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받는 애정 어린 걱정과 챙김들 또한 E에겐 없으면 안 되는 2차적 이득이 되었다.

 E는 엄마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과 여전히 엄마의 어린아이로 보살핌 받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에 혼란스러워했다. 엄마를 원하지만 밀어내고 싶은 마음. 14살의 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E의 몸이 그 마음을 너무도 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글이 길어져 다음 편에서 하나의 사례를 더 소개하고 이어 나의 개인적인 이유에 대해 고백을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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