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뭐 좋아해?
뭐 먹을 수 있어?
라면은 먹어?
대체 뭘 먹어?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2화에서는 내 식습관의 변천사에 대해 낱낱이 고백해보고자 한다.
처음부터 식단 조절만으로 살을 뺐던 건 아니었다. 나는 아침을 늘 챙겨 먹을 정도로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었었다. 소량을 먹더라도 세끼를 규칙적으로 챙겨 먹어야 살이 찌는 체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곤 했는데 다음날 먹을 아침식사가 기대되서였다. 아침에 가장 죄책감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자전거 타기나 산책, 등산, 수영도 좋아했고 줄넘기와 요가도 틈틈이 병행했다. 좋아하는 음식도 계란, 고구마, 두부 등 한식 위주였고 피자나 햄버거, 라면은 어려서부터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살이 찔래야 찔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살이 쪘고 '다이어트는 평생 하는 거'라는 말을 공감하는 사람이 되었다. 살이 찐 이유에 대해서는 5화에서 다룰 예정이다.
다이어트에 돌입하면 우선 간식을 전부 끊고 삼시세끼 한식 위주의 밥만 먹었다. 그러면 2킬로 정도는 빠졌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하는데 점차적으로 운동의 강도를 높였다. 그렇게 3~4킬로를 더 빼고 나면 어느 정도 정체기에 접어드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식사량을 반 정도 줄여서 목표한 몸무게에 도달하곤 했다. 나는 키가 작아서 55킬로를 넘으면 '살이 좀 있네'라는 피드백을 받곤 했는데 20살 때까지만 해도 내 몸에 47킬로 정도면 정말 예쁜 몸이라고 생각했다. 55킬로를 찍으면 최소 49~50킬로까지 살을 빼곤 했다. 47킬로 까지 뺀다고 해도 한 달 안에 49~50킬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저렴한 옷을 사 입곤 했는데 프리사이즈 옷들을 입기 위해서라도 50킬로를 넘지 말아야 했다.
술맛을 알고 나서는 체중관리가 더 어려워져 몸매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예전 방법으로는 40킬로 대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47킬로가 돼야 날씬하다고 봐주고 50 킬로면 통통하거나 딱 보통인 몸으로 봐줬기 때문에 나는 평생 마른 사람은 될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마른 사람들은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거라 나랑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내 별명은 '갈비'였다. 그만큼 말랐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이어트가 뭔지도 모르고 살았었다. 그때부터 마른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희귀종 사람들을 제외하고 마른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 잘 먹지 않았다. 먹는 걸 귀찮아하기까지 했다. 아침을 먹지 않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입도 짧고 가리는 음식도 많았다. 아침을 거른다는 게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시도해보니 아침의 공복감을 견디는 게 하루 중 가장 쉬운 일이었다. 1화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선은 식사의 양을 줄였다. 튀긴 음식과 빵, 떡을 먹지 않았다. 그 뒤엔 집에서 만큼은 식용유와 소금을 넣지 않은 요리를 해 먹었다. 데이트를 할 때에는 죽집에서 식사를 했다. 각 브랜드별 쿠폰과 포인트가 쌓였다. 그리고 결국엔 쌀을 끊었다. 대신 두부를 먹기 시작했는데 순두부 한 개를 냄비에 넣고 아무 간을 하지 않은 채 물과 계란만 넣어서 먹었다. 이 식단을 육 개월간 지속했다. 찌개 두부를 으깨서 스크램블 에그와 비벼 먹기를 3개월. 곤약을 식용유 없이 계란과 볶아 먹기를 또 몇 개월. 칼로리가 낮으나 배가 차는 음식들만 먹기 시작했다. 식비도 줄어 일석 이조라고 생각했다. 너무 배가 고플 땐 우유를 마셨다. 그리고 가장 문제 되던 술자리. 술을 마시는 날에는 식사를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츄팝츕스를 한 개 샀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츄팝츕스 한 번 빨기를 반복하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끼니를 거르고 식사 양을 대폭 줄이자 눈에 띄게 체중에 변화가 왔다. 하루가 다르게 저울의 눈금이 줄어들었다. 힘들게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운동을 하지 않으니 근육이 빠져 일명 걸그룹 일자 다리가 되었다.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바텐더로 일을 하는 아는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는 얼굴도 예뻤지만 매우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언니와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그 언니는 남아있는 안주를 마구 흡입하더니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모두 게워냈다. 처음엔 술 때문에 속이 아파서 토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 언니는 술자리 마지막에 화장실에 달려갔고 한참이 있어야 자리로 돌아왔다. 슬프게도 나는 그걸 배우고 말았다. 지겹도록 먹어온 간이 되어 있지 않은 음식에 지친 어느 날, 나는 매운 라면을 끓여 먹고 토를 했다.
처음엔 토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점차 요령이 생겼다. 초반에는 구토가 두렵고 무섭기도 해서 두세 번의 시원한 토를 하고 나면 만족하고 화장실을 나오곤 했다. 그 여파로 한 때 살이 좀 오르기도 했었다. 점차 손가락을 어디에 얼마나 집어넣어야 하는지, 토할 때 어떤 더러운 생각이 도움이 되는지, 어떤 종류의 음식들이 게워내기에 수월한지 보고서를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게워내는 요령이 늘면서 토를 하는 횟수가 늘었고 제거 행동이 체중 유지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30분 내로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은 뒤 토하기를 반복하는 지경이 되었다. 집에서만 하던 구토를 밖에서도 할 수 있게 되자 모임에서 억지로 음식을 먹게 되거나 술자리에서 안주를 먹고 토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먹은 모든 것을 확인 하 듯 토해내 마침내 비릿한 위액을 맛보고 피를 볼 정도가 되어야 만족하고 화장실을 나온다.
최근 2년간 거식증이 크게 악화되었다. 2년간 내가 먹은 것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물에 불린 (우유나 요구르트가 아닌) 오트밀과 뮤즐리.
쪄낸 단호박, 물에 삶은 고구마와 감자.
드레싱을 뿌리지 않은 각종 샐러드, 청양고추, 과일.
코스트코에서 판매하는 냉동 야채 믹스를 삶아 먹기.
3개에 천 원에 판매하는 연두부와 순두부.
크래미.
곤약.
그리고 근 일 년 동안은 위의 목록조차 불안해하며 잘 먹지 못했다. 기름 없이 조리한 스크램블 에그에서 반숙으로 삶아낸 계란을 먹다가 그보다도 더 칼로리가 낮은 맥반석 계란을 먹었다. 당연히 오트밀과 뮤즐리도 점차 먹지 않았다. 바나나도 끊었다. 감자와 고구마도 먹지 못했다. 너무도 사랑하던 유제품도 먹지 않았다. 대신,
청양고추와 토마토, 사과, 배, 감을 먹었다.
상추와 깻잎을 접시에 가득 담아 놓고 먹었다.
굽거나 소금을 묻히지 않은 재래김을 먹었다.
무를 작게 썰어 삶아 먹었다.
가장 많이 먹은 건 아메리카노와 물.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신장이 좋지 않아 잘 먹지 않는다는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추위를 너무 많이 탔고 늘 기운이 없었다. 근육이 다 빠져나가 유리문을 여는 것도 어려웠다. 생수 뚜껑을 따는 일에도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입원을 하게 됐고 환자용 단백질 음료를 먹게 되었다.
내가 24살이었을 때 나 보다 두 살 어린 A를 알게 되었다. A는 심각한 수준의 거식증이었다.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뼈밖에 없었다. A와 몇 개월을 어울려 다녔는데 그 몇 개월간 A가 음식을 씹어 먹는 걸 본 적이 없었다. A는 언제난 액체만 먹었다. 음료수와 술. 그게 몇 개월간 내 앞에서 A가 먹은 전부였다.
거식증이 악화되면서 가끔 A를 떠올렸다. 음료와 술을 '마시다'가 아닌 '먹었다'라고 표현해줘야 하는 A.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A의 행동들을 뒤늦게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A를 떠올리며 때때로 가슴 아파 눈물짓기도 하고 가끔은 원망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A의 행복을 간절히 빌곤 했다. 아직 A가 살아있기를, 회복되었기를, 회복되어가기를, 행복하기를.
그리고 지금 나는 씹지 않아도 넘어가는 종류를 즐겨먹는다고 나를 소개한다. 액체류를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