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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Apr 23. 2018

6화 노력- 안심하고 먹으라규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퇴원 후 오늘까지 매일 나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매번 진다. 밤에 침대에 누워 내일은 밥을 먹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아침이 오면 오후 2시에 첫 음식을 먹겠다고 결정한다. 때로는 오후 5시. 그리고 또 양배추와 고추를 먹는다. 밤이 되면 다시 하루를 후회하고 내일은 더 많이 먹을 거라며,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토하지 않고) 먹을 거라고 다짐한다.

 그래도 퇴원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 40킬로를 넘었으니 말이다. 입원 전에는 사과 한 개도 너무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먹으려고 시도하니 음식에 대한 불쾌감이 꽤나 줄어들었다. 삶은 계란을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먹어본 그 계란 맛이 얼마나 맛있던지, 계란 한판을 몇 주 만에 전부 먹어버릴 정도였다. 그토록 좋아하던 우유, 두유, 치즈 등의 유제품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과의 식사자리를 피하고 술에 취하지 않으면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백반을 같이 먹겠다고 지인과 약속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매일 밤,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 같아 절망하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며 자괴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다시 다짐하며 잠이 든다. 너무도 더디고 여전히 병리적인 생활의 연속이지만 절대 제자리걸음이 아니지 않으냐고, 나아질 수 있다고, 오늘 먹은 것들 모두 아주 잘했다고.


 6화에서는 내가 퇴원 후 먹고 있는 음식들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재료별 칼로리와 조리법을 연구해서 그나마 안심하고 먹는 메뉴들이다.




 나트륨을 최소화한 식사를 몇 년이나 이어왔기 때문에 각종 드레싱이나 소금, 쌈장을 일체 곁들이지 않아도 나는 어색하지가 않다. 대신 마늘과 양파, 고추, 후추를 주로 사용하며 탕 종류는 계란으로 맛을 낸다. 그거면 내게는 충분히 먹을만한 음식이 된다.


부끄 닭 :  영계를 살짝 삶아서 기름을 뺀 뒤 전자렌지로 마져 익힌 닭 요리.

부끄 닭이라고 이름 붙인 이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닭 손질이다. 닭 껍질을 말끔히 잘라내는데 이때 껍질과 살 사이의 지방을 모두 제거한다. 엉덩이 부분과 목에 특히 지방이 많은데 엉덩이 부분은 꼬리와 함께 그대로 잘라버린다. 생닭의 껍질을 벗기는 일에는 꽤나 힘이 필요하다. 닭을 삶은 후 껍질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익으면 껍질은 분리가 쉬워도 지방은 육안으로 구분해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닭은 영계가 살이 더 부드럽기도 하지만 확실히 지방도 적고 값도 저렴하기 때문에 가장 작은 닭으로 선택한다. 소금 간이나 소스는 전혀 곁들이지 않고 대신 닭을 삶을 때 월계수 잎과 후추를 넣는다. 처음에는 비린내가 날까 싶어 닭을 우유에 담가 뒀다가 요리하곤 했지만 월계수 잎을 사용하니 그런 번거로운 작업도 필요치 않고 싱거운 맛까지 잡아주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뭐가 가장 먹고 싶냐는 질문에 '치킨!'이라고 대답할 만큼 닭요리가 먹고 싶어서 만들게 된 요리이다. 삶아서 기름기를 어느 정도 제거한 뒤 전자레인지로 7분에서 10분간 더 익혀 먹는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좀 더 쫄깃해진 살들이 구운 닭의 느낌을 주기 때문인데 삶아서 먹는 부드러운 맛도 좋아한다. 더 잘 먹을 수 있게 되면 미니 오븐을 구매하고 싶다.


프링글스 대신 고구마칩

 이 음식은 과자가 먹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고구마나 감자를 가능한 얇게 썬 뒤에 종이 호일을 두른 접시에 올린다. 고구마의 양과 수분 함유량에 따라 다른 시간이 필요한데 보통 전자레인지로 7분에서 10분이면 다 익는다. 고구마를 동그랗게 썰기도 하고 세로로 길게 썰기도 하며 과자 먹는 느낌을 다양하게 주는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 개씩 집어먹으면 오래 먹을 수 있기도 하고 바삭바삭 소리도 난다. 여기서 오래 먹을 수 있다는 의미는 고구마를 삶아 먹을 때 10번의 젓가락질이 필요한 것에 비해 조각난 고구마 한 개는 보다 더 오래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고구마 한 개지만 입에 넣는 횟수를 늘려 더 많이 먹은 듯한 포만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로리로 따진다면 삶거나 찐 고구마의 칼로리가 더 적은 것이 사실이다. 전자레인지는 고구마의 수분만 가져가고 당도는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는 칼로리가 가장 낮은 생고구마나 고구마 껍질만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기도 했었다.


왼쪽부터 오트밀 빵/ 오트밀 빵에 치즈 토핑/  고구마 빵에 치즈 토핑

 밀가루를 섭취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시중에서 파는 빵에 얼마나 많은 버터와 설탕이 들어가는지 너무 잘 알고있다. 이 요리는 빵이 먹고 싶으나 오븐이 없는 내게 안성맞춤인 빵 요리이다. 간단한 레시피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마를 삶거나 쪄서 으깬다.

2. 거품기로 계란 흰자에 거품을 내어 머랭을 만든다. (설탕은 당연히 넣지 않는다.)

3. 으깬 고구마와 머랭을 조심히 섞는다. (이때 계란 노른자를 같이 섞어도 좋다.)

4. 약간의 오일을 전자레인지 그릇에 바른 후 3번을 담는다. (요리가 완성된 후 빵과 그릇의 수월한 분리를 위해 오일을 바르는데 나는 오일도 바르지 않는다.) 그릇에 랩을 두르고 구멍을 뚫는다.

5. 전자레인지로 5분에서 7분이면 익는다.  

 고구마 대신 단호박이나 바나나, 감자를 사용해도 된다. 나는 오트밀을 넣기도 하고 치즈를 올려 간을 맞추기도 한다. 용량을 적지 않았는데 고구마 한 개를 다 넣어도 되나 수십 번 고민하고 최소화해서 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란 흰자는 최소 두 개가 필요하다.


벗파구이 : 버섯과 양파를 구운 요리. 곤약, 계란, 치즈등을 첨가할 수 있다.

 몸에도 좋고 씹는 즐거움도 주는 벗파구이 또한 안심 주는 착한 메뉴이다. 버섯도 양파도 그저 굽기만 해도 맛이 좋다. 구워진 버섯의 향도 좋고 양파의 단맛도 훌륭하다. 후추를 후춧후춧 뿌려주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기름을 두르지 않고 구워내는데 버섯과 양파에서 물이 많이 나와 눌어붙거나 타지 않는다. 가끔은 펜이 아닌 냄비에 삶듯이 요리할 때도 있다. 그저 재료를 담고 뚜껑을 덮어두면 알아서 잘 익는다. 곤약이나 계란을 섞을 때도 있다. 계란은 노른자를 풀어 흰자와 섞어 둔 것을 어느 정도 익은 버섯 양파에 투하한다. 그러면 무엇을 먹어도 계란의 풍미가 느껴진다. 벗파구이는 먹고 나면 배가 매우 불러 정말 오랜 시간을 들여 먹어야 하는데 먹으면서 계속 되뇐다.

몸에 나쁜 건 하나도 먹지 않았어. 전부 훌륭한 재료들이잖아.


수플레 오믈렛

 수플레 오믈렛은 그저 계란 흰자를 머랭 쳐준 뒤 노른자를 조심히 섞어서 구워내면 된다. 나는 당연히 머랭에 설탕을 넣지 않는다. 펜에 구워낼 때는 기름을 두를 수밖에 없는데 가장 칼로리가 낮은 해바라기씨유나 포도씨유를 사용한다. 버터나 식용유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머랭을 만들 때 노른자와 분리한 흰자를 냉장고에 넣어뒀다 사용하면 머랭이 더 잘 만들어진다. 완성된 반죽에 치즈를 한 장 올리는 사치를 부리면 내게는 더할 것 없는 요리가 된다. 반죽이 70% 익었을 때 불을 끄고 잔열에 잠시 두면 부드러운 오믈렛을 맛볼 수 있고 그 상태에서 뚜껑을 덮고 1분 정도 두면 완전히 익은 오믈렛이 된다.


 수플레 오믈렛 반죽을 전자레인지로 약 5분간 익힌 계란 찜

  커서 닭을 키우고 싶다고 할 만큼 어려서부터 나는 계란을 좋아했다. 계란찜은 내게 역사가 긴 음식이다. 음식을 거부하기 전에는 왕란 3개를 우유 200ml와 섞은 뒤 모차렐라 치즈와 체다 치즈를 올린 계란찜을 만들어 먹었었다. 레시피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물이 아닌 우유를 넣고 또 거기에 치즈를 넣어 먹냐고 하지만 내가 만들어 주면 부드럽고 맛있다고 다들 좋아했다. 그때는 계란찜에 소금도 넣곤 했었는데 지금은 체다치즈를 한 장 올리는 것만으로도 짜다고 느낀다.


요즘 주로 먹는 계란 반숙과 연어, 양배추.

 매번 청양고추를 함께 먹는데 청양고추의 매콤함이 조미되지 않은 음식들의 밍밍함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미나리 채소 탕과 홍합탕.

 미나리와 콩나물, 혹은 숙주와 버섯 등을 넣고 끓인다. 순두부나 연두부를 넣어 끓일 때도 있다. 이때도 다른 양념은 하지 않고 오로지 계란만 풀어준다. 굳이 넣는다면 청량고추나 후추 정도이다. 홍합탕 역시 가성비 좋은 메뉴이다. 저렴하기도 하고 칼로리도 낮으며 그저 끓이기만 하면 시원한 국물까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곤약을 볶음이나 탕 요리에 넣곤 하는데 곤약이 들어간 요리는 무조건 곤약을 가장 먼저 먹는다. 이렇게도 몸에 좋은 '착한' 재료들과 안심할 수 있는 조리법에, 칼로리는 낮고 포만감은 큰 요리들이지만 이걸 먹고도 토하니까 거식증이다. 견디지 못하고 토한다 해도 먹은 모든 걸 다 토해내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한 마음 때문에 곤약을 제일 처음 먹는 것이다. '다 토해내지 못했다 해도 남아있는 건 겨우 곤약일거야.' 라고 자위하기 위해서.


피조개를 삶아서 작게 잘라 먹는다. 토마토는 언제나 진리. 구운 생선 또한 안심 되는 메뉴이다.
생 양파와 생 양배추 등 생 채소도 즐겨 찾는 메뉴이다.


 나는 6화를 쓰면서 계란 반숙 외에 맛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간이 없는 음식이 어색하지 않다. 내게는 충분하다. 먹을만한 음식이 된다. 더할 것 없는 요리이다.

 이런 표현들이 절대 틀리진 않다. 위의 요리들은 먹을 만하고 건강에 좋고 포만감은 크고 칼로리는 낮다. 그러나 3개월, 6개월을 넘어 년 단위로 주야장천 먹어대기에 맛있는 음식들은 아니다. 그렇다!

 거식증 환자에게 완벽한 음식일지언정 맛있는 음식은 아니다!

 처음부터 양념의 맛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지방의 부드러움과 버터의 고소함을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다. 자극적인 맛을 청양고추로 애써 대체해보지만 라면 국물이 그리운 걸 부정할 수가 없다.


  지금은 이 음식들을 먹고도 토를 하지만 거식증이 천천히 나를 좀먹었던 것처럼 회복되는 과정도 천천히 진행되는 거라 믿는다. 먹는 양이 점진적으로 줄었던 것처럼 느는 것도 점진적으로 늘어갈 것이다. 토해내 버리지만 다시 먹기 시작하니 먹는 행위의 위화감이 점차 줄었고 식당에서 회나 해산물을 먹고 토하지 않는 날들도 생겼다. 어떻게 하면 먹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내가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먹고 소화시키는 것을 늘려갈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지할 것이다. 먹어도 된다고. 안심하라고. 먹어야 하는 거라고. 먹는 건 좋은 일이고 사람은 먹어야 산다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예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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