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나는 열여섯 살 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했다. 어딘가 얹혀살기도 하고 하우스 셰어를 하거나 기숙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보호자나 울타리 없이 혼자서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거처할 곳이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처럼 지인들 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찜질방 생활을 하거나 학교에 숨어 살기도 했다. 십 대에는 온전한 집이나 방을 구하지 못해 친구들 집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곤 했었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자다가 경비에게 걸린 후로는 주로 24시 도서관이나 비교적 깨끗한 화장실, 대학병원 대합실 등에서 밤을 보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지내다 보니 당연히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푸드코트 식기 반납구에서 사람들이 남긴 음식을 챙기거나 마트에서 빵과 과자를 훔쳐 먹었다. 일요일엔 교회에 나가 점심을 해결했고 어쩌다 싸구려 식빵을 사면 하루에 한 장씩 곰팡이가 필 때까지 아껴 먹었다. 쌀이 먹고 싶어 햇반을 훔쳐도 전자레인지가 없으니 딱딱한 밥알을 씹어야 했다. 누텔라 초코잼이 그리 유명한지도 모를 시절, 가장 작은 사이즈의 누텔라를 가방에 가지고 다니다가 너무너무 배가 고플 때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이 시절에 그나마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술자리였다. 나는 속된 말로 노는 애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러 다녔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자취방이나 빈 공터에 둘러앉아 술판을 벌이곤 했는데 그곳에 가면 과자나 음료수는 물론이고 치킨이나 분식, 운이 좋으면 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 배도 채울 수 있고 늦은 시각까지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런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교복과 어리숙한 나의 성격이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곧 일주일에 몇 번은 그런 자리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2화에서 밝힌 것처럼 어려서 나는 살이 찔래야 찔 수 없는 식습관을 가졌었다. '갈비'라고 불리던 시절에는 먹는 것에 (아마도 우울한 정서 때문에) 큰 욕심이 없었었다. 그러나 십 대 후반에 겪은 굶주림의 기억은 나에게 '식탐'을 선사하였다. 나는 간사하게도 언제나 먹을 수 있을 때에는 소중한 줄 몰랐던 음식을 애타게 열망하게 되었다. 음식은 나에게 그것이 무엇이든, 때가 언제든 눈 앞에 보이면 먹고 봐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음식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지금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돼!
이것이 5화에서 이야기하기로 한 내가 처음 살이 찐 이유이다. 규칙적인 식습관이 무너지고 간헐적으로 음식을 폭식하듯 섭취했으며 술자리에서 먹는 것들은 모두 고칼로리였다. 살이 찐 것 자체가 문제가 될 필요는 없었다. 비만이 된 것도 아니고 예전보다 체중이 증가한 것이지 보기 흉하게 찐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관심이었다.
살이 오르니 좋아 보이네. 요즘 잘 지내나 봐. 어떤 좋은 걸 먹고 다니면 그렇게 살이 찌니. 잘 먹고 다니는구나. 나는 네가 고생하며 지낼 거라 생각했는데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원했다. 누군가 더 근본적으로 도와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이 찐 내 외관은 내가 원하는 관심이나 애정과는 정 반대의 것을 주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문제는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돈을 벌 때에도 이어졌다. 내가 십 대일 당시에는 지금처럼 아르바이트 환경이 좋지 못했다. 계약서를 쓰고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람은 없었고 최저임금이 지켜지는 곳도 손에 꼽아야 했다. 하물며 어리고 작은 체구의 여. 자. 아. 이. 가 일을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새벽에 신문 보급소에 찾아가 시켜만 달라고 사정해서 처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약 50일을 임금 없이 일을 하고 나서야 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사장은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돈을 주지 않겠다고 화를 내곤 했다. 행여 잠을 자면 못 일어날까, 야자를 마치고 곧장 신문을 돌리러 가는데도 고생한 사람처럼 살이 빠지진 않았다. 어렵게 야식집에서 일하게 됐을 때도 홀은 물론 주방의 일까지 도맡으며 열심이었지만 일을 그만뒀을 때 5킬로가 쪄 있었다. 편의점 알바 역시 폐기되는 인스턴트식품들을 밤새 먹고 낮에는 굶는 생활이 이어지니 살이 빠지지 않았다. 쉬지 못해 몸이 붓고 부종은 내 몸이 되어 가라앉을 생각이 없었다. 낮에는 학교나 재수 학원을 다녔기에 주로 야간에 일을 했고 일하면서 먹는 것들과 내가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영양보다는 그저 열량이 높은 음식들이었다. 잘 먹어서가 아닌 가난해서 살이 찐다는 것이 내게는 팩트였다.
지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그중 한 일화는 이러했다. 당시 내 나이는 열일곱이었고 그날은 대학병원 대합실에서 새벽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곳은 1층의 원무과 앞이었는데 원무과의 데스크는 서류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창 구멍이 있었다. 순간 원무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내 몸은 그 구멍을 쉽게 통과했고 사무실 안은 대합실 보다 따듯하고 안심됐으며 심지어 탕비실도 있었다. 나는 믹스 커피와 사탕들을 챙기고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잤다. 다리 뻗고 자는 안락함이 편했던 건지 부지런한 직원이 출근할 때까지도 나는 소파에 있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나는 재빨리 몸을 숨긴 후 틈을 봐 도망갔지만 내 소지품을 챙겨 나오지는 못했다. 흔적을 남겨두고 왔으니 당분간 그쪽에는 얼씬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고 온 가방 안에는 누가 봐도 원무과 탕비실에서 훔친 믹스커피와 사탕들이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그날 밤, 나는 또다시 원무과를 찾아갔다. 탕비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였다. 사무실에 숨어들어 도둑질 한 걸 걸리는 두려움보다 전날 본 그 케이크가 없어졌을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컸었다. 냉장고를 열어 케이크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뻐했던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경비에게 곧바로 붙들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나는 이 순간을 몇 년 동안 반복해서 꿈으로 꿨다. 케이크를 본 내가 미소 지으면 뒤에서 나타난 경비가 날 붙들고, 결국 케이크는 한입도 먹지 못하는 장면을.
거식증에 시달려 하루 종일 굶고 탄수화물을 끊어냈음에도 케이크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시간을 들여 먹었다. 지인이 케이크 한판을 사다 줬을 때는 앉은자리에서 전부 먹어 치운 적도 있었다. 술에 취해 케이크를 사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손으로 퍼먹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정말 다각적이며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생물이다. 음식에 한이 맺힐 정도로 식탐이 생겼으면서도 관심과 애정,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음식을 거부하니까 말이다.
2014년, 한국과 영국은 합동으로 거식증 치료제 연구를 했다. 그 연구에 참여 했던 서울 백병원의 김율리 교수는 거식증 환자들에게 옥시토신을 투여했을 때 음식에 대한 불안과 집착증세가 감소되는 결과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옥시토신은 흔히 사랑에 빠지면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있다.
독하게 단식하는 내가 지인이 사주는 케이크 조각을 토하지 않고 먹어내는 것은 어쩌면 케이크에 맺힌 한 때문이 아니라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끼기때문이 아닐까. 진정한 옥시토신이 분비되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