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MBTI가 뭐예요?”
“EN 뭐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어디에서든 질문이 들어온다. 수십 년 굳건하던 혈액형의 아성을 무너트린 광풍이다. 밀려오는 대국민적 사조는 적당한 동조가 유일한 회피지만 쉽지 않다. 다들 어떻게 자기 MBTI를 외우고 다니는 걸까?
한동안 잠잠하더니 회사에서 또 검사다. 생활기록부 같은 성적표를 받아 든다. F 100점. 인생 통틀어 처음 받아본 100점짜리 성적표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나도 남보다 특출 난 점은 있는 사람이구나, 그저 그런 회사원은 아니었다고!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어 인터넷을 뒤진다. F 만점자의 멋진 점을 잔뜩 알아내고 싶다. 아무리 뒤적여도 좋은 말이 없다.
“극 F인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마세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든다. 이래서 중용, 중용하는구나. 그래, 옛 성인들은 MBTI 만점의 위험을 이미 알아버렸던 거야. 자아도취와 반성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다 결심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F 100의 선봉에 서서 그들을 대변해 보자!
거창한 대의명분은 됐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첫째는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만난 아내의 알 권리이며 두 번째는 잃어버린 자아 회복이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며, 매일 감성을 사형대에 올려 방아쇠를 당기는 10년 차 회사원. 매 순간 불사신처럼 살아나는 반쪽과의 싸움이었다. 비워진 한쪽의 공허함을 글과 책으로 겨우 메꾸어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희미해졌다.
이 연재는 사망 직전인 내부의 반쪽 재활 프로그램이며, 인생을 함께 하는 외부의 반쪽을 위한 설명서다. 글을 기획하고 끼적이는 이 순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평온이 밀려온다. 고요한 카페에 석양이 스며들고 있다.
그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었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