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하루가 말을 걸 때
사랑하는 작은 딸은 차마 눈에 담지도 못하고 애써 외면하며 떠나신 우리 아빠.
장례를 치르던 중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김명완 환자분, 골수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혈액암으로 진단되었습니다.”
혈액암.
지금 들어도 낯선 그 병명.
폐도, 간도 아닌 혈액 때문에 그렇게 짧은 시간 고통 속에 몸부림치셨다는 걸까.
응급실행부터 사망선고까지, 열흘.
단순 감기인 줄 알고 내과를 찾으셨던 아빠는
두 발로 걸어 응급실에 들어갔다가
결국 구급차에 실려 상급병원으로 옮겨지셨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동생은 “혈액암이 아니었더라도 오래 버티기 힘드셨을 거야. 폐와 간이 너무 망가져 있었어.”라고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책임감, 그리고 외로움이
아빠의 폐와 간 깊숙이 스며 있었던 건 아닐까.
아빠의 직업은 택시기사였다.
하지만 개인택시를 받은 후로는 일보다 술과 놀이에 더 빠져 있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에서 멀어질수록, 가족의 사랑에서도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엄마와 나는 개인택시 처분을 독려하고 처리된 돈으로 레스토랑을 계약해 둘이서 운영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빠는 서서히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동의했던 처분이지만 못내 가슴에 응어리가 진 것이다.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의 마음속 어딘가엔 가족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술만 드시면 화살처럼 상처되는 말을 내뱉으셨고,
그 후에는 늘 혼자 고립되곤 했다.
그렇게 남긴 건, 가족들 가슴속에 크고 작은 생채기뿐이었다.
내 결혼식 전날이었다.
피로연을 마치고 부산에서 내려온 친척들과 함께 집으로 왔다.
서로 얘기 중 아빠의 불평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결국 가족 간 다툼이 일어났다.
나는 밤새 눈물로 지새우고,
결혼식 날엔 퉁퉁 부은 눈의 신부가 되었다.
전날 아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신 후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결혼식 당일,
아빠는 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작은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을 했다.
그 순간의 허전함과 서러움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빠의 얼굴을 아는 친구들은 어리둥절해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 일 없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신랑·신부 편지 낭독 때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끝내 말을 잇지 못해 편지 낭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식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다행히 외할아버지의 진두지휘 덕에 결혼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빠에 대한 미움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맞벌이로 바쁜 우리 부부를 대신해 중간중간 쌍둥이를 돌봐주시기도 했고, 술도 많이 줄이셨다.
그렇게 아빠는 가족의 곁으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쌍둥이 중 둘째를 유독 아끼며 인자한 할아버지로 남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좋은 모습으로 가시고 호상이지. 호상이야.”
정말 그랬다.
돌아가실 때 아빠의 얼굴은 세상 그 누구보다 편안했다.
희미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그렇게 아빠는 가족 곁을 떠나셨다.
아빠의 혈액암은 희귀 암으로 등록되어
병원비 대부분이 감면되었다.
끝까지 가족에게 작은 부담 하나조차 남기지 않으셨다.
조카는 어릴 적 간질 증상으로 오래 약을 복용해야 했다.
엄마는 아빠가 사망선고가 내려진 후 애써 슬픔을 달래며 하나의 소원을 서둘러 아빠에게 빌었다.
“ㅇㅇ아빠, 가는 길 힘들겠지만 ㅇㅇ이 아픈 것만 싹 들고 가줍써.”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그 부탁을 정말 들어주신 것 같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조카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약도 끊고,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낸다.
이후로도 아빠는 내 꿈속에 자주 찾아오셨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빠가 꿈에 나타난 날엔 어김없이 그다음 날 크고 작은 사고가 생겼다.
큰아들이 자전거를 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 비탈길을 내려오던 순간, 전봇대에 부딪혀 인도로 쓰러졌다.
조금만 더 나갔다면 대로로 뛰어들었을 사고였다.
나는 아이들과 스카우트 하이킹 중 마치 귀신에 씐 듯 반대편 트럭을 향해 역주행했다.
다행히 바로 앞에서 쓰러져 트럭에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범퍼 아래에 닿을 뻔했을 정도다.
시댁에선 샤워 후 옷을 입다 미끄러져 변기 옆 바닥에 떨어지면서 쇄골이 골절되었다.
머리를 부딪히지 않은 게 그저 기적이었다.
이 모든 사고 전날, 아빠는 어김없이 무섭고 선명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셨다. 마치 “조심하라”는 신호처럼.
하지만 요즘은 아빠가 내 꿈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신다.
엄마는 “이제 나쁜 일이 없을 테니 그런 거야.” 하셨지만, 나는 가끔 꿈에서라도 다시 뵙고 싶다.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시댁에서는 외할머님께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아빠의 발인 날은, 시댁 식구들이 장례에 함께하지 못했다.
엄마는 말했다.
“결혼식에 오지 못해 면목 없으시다고,
여기는 안 오셔도 된다고 하는 것 같아.”
아빠의 장례는 남편의 도움이 컸다. 하나부터 열까지 진두지휘하며, 어떤 일 하나 막힘 없이 흘러가도록 해줬다. 그 덕분에 아빠를 편안히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지금도 늘 고맙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달이면 어김없이 아빠가 보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선물상자를 들고 들어오던 모습.
둘째 손을 잡고 마트에 다녀오시던 모습.
아픈 날 사무실 앞에 찾아오셨던 모습.
골수검사 중 떨던 뒷모습.
그리고 영정사진 속 잔잔한 미소.
아빠가 아직 곁에 계시다면 어땠을까,
많이 보고 싶다.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먼 길 떠나실 때 입고 가실 옷가지들을 도두봉 근처 해안도로에 가서 태워드렸다.
그 순간 눈앞에 학처럼 생긴 큰 새가 머리 위를 두어 번 돌더니 서쪽으로 날아갔다.
순간 아빠가 살아생전에 학을 좋아한다고, 학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아빠, 혹시 아빠야?"
엄마와 남동생도 신기해하며 각자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삭였다.
"잘 가요. 아빠.
그리고,
아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