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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 전문성의 끝판왕, 출제위원에 도전하라!

4. 교사!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

by 신영환

우선 수능 시험을 보지 않는 선생님들께는 양해의 말씀을 구하고 시작할까 합니다. 이번 주제는 수능 시험에 나오는 과목 선생님들께 해당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그래도 궁금하시다면 한번 꼭 읽어봐 주세요.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혜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영어 교사이기에 수능 시험 과목을 가르칩니다. 신규교사를 벗어나 점점 수업에 자신감이 생기고, 심지어 여러 경험을 하면서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바뀔까 말까 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학년도 걸치고, 수업도 걸치면서 출제하는 문항수가 많다 보니 저도 모르게 출제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출제 관련 공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5년 차 이상 1급 정교사니까 자격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력을 작성하면서 불 보듯 떨어지겠구나 싶었어요. 집필 경력이나 출제 또는 검토 이력에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도 일단 지원해봤습니다. 물론 보기 좋게 결과에 대한 소식을 받을 수는 없었죠. 왜냐면 개별 연락을 한다고 공지되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쓴 맛을 봤음에도 저는 굴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력을 채울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찾다 보니 EBS 연계 교재 출제 및 검토위원을 뽑는다는 안내문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것도 지원해보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또 이력에 쓸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이번에는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거 아니다 싶어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EBS 연계 교재 온라인 사전 검토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EBS 홈페이지 공지사항에는 다양한 정보가 올라오니까 혹시나 해서 수시로 확인한 덕분에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왠지 잘하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동안과는 달리 모집 인원이 많아 보였습니다. 가진 경력은 없으나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글을 열심히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역시 능력이 부족할 때는 열정이 통하는 법입니다. 다행히도 처음으로 출제와 검토 관련 일을 맡게 된 거죠. 아직 출간되지 않은 교재의 분량을 나눠서 단순 오타, 편집상 오류, 내용상 오류 등 잡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이라 그런지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오류가 잘 보이지 않더라고요. 대신에 사소한 오타나 오류는 나름 많이 잡아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적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는지 다음에는 지원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제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두 번의 사전 온라인 검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다음 해에 공공기관 출제 위원 공문을 보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이력에 적을 게 있어서 살짝 좋은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이번 출제위원으로 위촉되어 함께 하게 되었다는 연락이었죠. 너무 신나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었지만, 출제나 검토 관련 활동은 보안을 철저히 해야 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관리자 분들께만 알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습니다. 지원하기 전에도 학교 일정을 고려해야 하니까 허락을 받고 공문 발송을 해야 하고, 합격을 해도 학교 밖 활동이니까 교장, 교감 선생님께 보고해야 해서였죠. 그런데 갑자기 일정을 확인하시고는 방학 전 이틀이 있으니 허락할 수 없다는 거예요. 분명 사전 허락받을 때는 괜찮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안 된다고 하시니 난감했습니다.


저는 재고를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아깝지만 다시 연락 주신 다른 선생님께 학교에서 허락이 안 나서 못 가게 되었다니 당황스러워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저의 꿈만 같던 첫 출제위원 합격은 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좋으신 분이라 제게 그럴 수도 있다면 전화기 너머로 ‘내년에는 꼭 같이 하자’고 위로해주시더군요.


방학 전 이틀이 학기 중이라 안된다는 말이 처음에는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사전에는 허락했다가 갑자기 불허하시니 더 억울했지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모든 활동은 학교장 허락이 있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었죠.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아니고 다른 선생님께 말이죠. 2학기가 되었는데, 한 선생님이 수능 출제위원으로 뽑히게 된 것이죠. 무려 한 달 반 동안 학교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허락받지 못한 이유는 담임교사인데 학기 중에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도 담임교사인데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비우더라고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나만 차별 대우를 받은 건가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오고, 그동안 학교를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한 모든 일들이 물거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립학교니까 애사심이라는 게 생겨서 열심히 하게 되는데 이런 처우를 받으니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성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길가에 내놓아야 하니 참아야만 했습니다.


이 일로 한동안 사람들이 너무 미웠습니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얼굴도 쳐다보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인사를 해야 하니 목례만 가볍게 하고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학년 부장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저한테 미안하게 생각한 마음이라고 하셨다고 하네요. 그래도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다음에 기회가 오면 잡기 위해 찾아가서 따지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다음 해에 천운이 닿았는지 일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원하려고 허락받으러 가니 일정이 방학 중에 있으니 지원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작년에 제가 갑자기 거절을 한 부분이 있어서 살짝 걱정되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지원했습니다. 물론 이때는 영어 교재 한 권을 집필한 이력도 있어서 더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작년에 억울한 감정을 하늘이 이해했는지 다행히도 이번에도 합격하여 출제위원이 되었습니다.


막상 출제 경험을 하는 동안 제게는 신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매일 깨달았기 때문이죠. 역시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치의 오류 없는 문항 제작을 위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집중을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저는 정말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작년에 제게 전화 주셨던 선생님이 제가 소속된 팀 대표라서 또 반갑고 고마운 인연이라 생각했습니다. 내년에 꼭 보자던 위로의 말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죠.


출제 경험을 통해 저는 내적 성장과 외적 성장을 모두 이뤘습니다. 학교에 돌아와서 내신 시험 문제를 낼 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의 문제를 검토할 때도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한 번 큰 경험이 이력이 되어 다른 출제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보안상의 문제로 어디 소속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공공기관(공무원 관련) 영어 시험 출제 기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제는 교사로서는 출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능 출제 위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 기회가 쉽게 오지 않더군요. 새옹지마 혹은 전화위복이라고 하죠? 코로나가 심해진 해에 드디어 제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또 발목을 잡는 건 일정이었습니다. 수능 출제를 들어가기 전에 필수로 해야 하는 코스가 있습니다. 수능 이전에 보는 6월이나 9월 모의평가 출제나 검토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게도 그 기회가 왔는데 역시나 학기 중이라서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동안 참고 숨겨두었던 속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선생님은 수능 출제를 갔는데 저는 왜 안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수능만 되고 다른 건 안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차분하게 설명드렸습니다. 지금 이 출제를 다녀와야 수능 출제를 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래도 완강하게 안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덧붙이시는 말씀에 더는 혀를 내두르며 결국 포기했습니다.


“부탁을 하려면 좀 친하게 지내다가 해야지. 필요할 때만 그렇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저는 제가 왜 기회를 얻지 못했는지 그때 알았습니다. 평소 살갑게 대하지도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찾는 교사였다는 의미였습니다. 미안해서 이유를 돌려 말하신 건지, 진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상처와 동시에 단념할 명분이 생겼지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러브콜이 왔지만, 더 이상 허락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선에서 모두 거절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감정이입을 했다면 너무 우울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나 걱정할 것도 같습니다. 친하지는 않아도 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기 때문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교과 전문성의 끝판왕 출제 위원이라는 분야를 제 인생에서 지우기로 결심해서 괜찮았습니다. 대신에 다른 전문성을 기르기 시작했고, 덕분에 이렇게 작가가 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관리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만일에 계속 출제 분야로 제 전문성을 길렀다면 과연 작가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이 때문이에요. 그리고 작가로서의 활동은 학교 일정에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관리자 분들께서도 적극 응원해주십니다. 학교 홍보도 되고 좋은 일이 분명히 맞으니까요. 아무튼 지금은 별 탈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지만요.


이 이야기를 이 책에 넣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규 선생님들께 꼭 필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용기 내어 써봤습니다. 만일 자기 과목이 수능 출제와 관련이 있다면 저는 곡 출제나 검토 관련 활동 경험을 해볼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우선 자신의 교과 전문성과 평가(출제) 역량을 기를 수 있고, 학교에 돌아와서는 다른 선생님들께도 배운 내용을 전파하여 출제 오류 위험성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책을 읽으시는 분이 관리자분이라면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학교 학사 일정에 그렇게까지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혹은 조금은 영향을 주더라도 선생님들의 개인 발전에 힘을 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담임교사를 하면서 우리 반 아이가 빠지면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 노심초사하면서 관리자 분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꿈을 짓밟고, 앞날을 막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저는 출제와 검토 경험 덕분에 교과 전문성을 많이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재 집필도 조금씩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올해는 팀을 이끄는 역할 제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사했습니다. 제가 갈 길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박수칠 때 떠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누군가 더 훌륭한 분이 이끌어주실 거라고 믿고 있고요. 그 주인공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주의사항이 하나 있어서 알려드립니다. EBS 연계 교재 검토 위원은 이미 EBS 교재를 많이 만들었던 출제 위원들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규교사는 될 확률이 낮으니 주의해서 지원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추가로 출제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제 소셜미디어를 통해 문의해주시면, 책에서는 다룰 수 없었지만 필요한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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